"버진 스노우"라는 번안된 영화 제목과 거울에 비쳐지는 어머니와 딸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봤을 때는 백설공주(Snow White) 동화를 현대식으로 변형한 소녀의 성장담이 아닐까 짐작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엄마가 거울 속의 딸을 보면서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하며 묻는 영화는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관객들은 몹시 혼란스러웠을 거다. 에바 그린하고 쉐일린 우드 중에 누가 더 예쁜지 판단해야 하는 문제는 솔로몬왕에게 물어봐야 할 수준이다. (영화 속에서는 엄마와 딸로 나오지만, 두 배우의 실제 나이차이는 12살 밖에 나지 않는다.) 보기좋게 틀리긴 했지만, 덕분에 겸손한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 이하 영화 내용이 나옵니다. 

영화 포스터

출처 : DAUM 영화



버진 스노우(Virgin Snow)란 한번도 밟지 않은 하얀 눈들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한다. 영화를 본 뒤에는 원래 영어 제목인 "White Bird in Blizzard"(눈폭풍 속의 하얀 새)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철모르는 수컷들은 여자 처녀를 떠올리기 쉬운 "버진 스노우"로 바뀌었다.

아마도 캣 코너(Kat Connor, 여자 주인공)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남자와 첫경험을 한 뒤 엄마와 같은 성이 되었다는 장면에서 따온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신은 서지 않는다. 미혼 남자로써는 공감하기 어려운 얘기지만, 대사에서 풍겨오는 뉘앙스는 약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로운 대사였다. 

영화는 딸이 여자가 되던 날, 엄마가 사라지면서 영화 속 드라마와 미스테리가 동시에 진행된다. 감독이 가장 대중적으로 만들었다는 데, 이전 작품들을 보지 못해 얼마나 대중화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엔딩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적어도 노력했다는 걸 인정해 줄 만하다. 인내의 열매가 달지는 못해도 새콤한 정도는 된다.

다른 영화들 속에서도 뻔하게 봤던 설정과 스토리적인 트릭들임에도 교묘한 내러티브 덕분에 관객들이 눈치채기 어렵다. 평소 감독의 작품들을 봐왔던 열혈영화팬들이나 스릴러 장르에 특화된 관객들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영화 자체가 스릴러를 내세우고 있지 않으니 그냥 가볍게 즐긴다는 생각으로 메인 드라마를 따라가면 좋을 것 같다. 

이런 부분을 제외하면 소녀의 성장기 속에서 엄마의 부재가 가져오는 불안감을 표현하는 비교적 선명한 영화다. 이해할 수 없는 엄마, 이미 대화가 끊어진 엄마의 존재가 사라진 것을 여자로 성장하려는 딸은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실제 성인이 되었을 때는 그것이 결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되면서 훌쩍 커버렸다는 걸 자각한다는 식의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엄마의 성을 가지게 된 소녀는 비로소 엄마를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장면

출처 : DAUM 영화



불안감과 괴기스러운 기억들은 감독이 좋아한다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트윈 픽스" TV시리즈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연극적인 연출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왠지 화면 속 배우들의 위치나 의도적인 배경들(굳이 말하자면 미쟝센들이라고나 할까)이 꽤 공들여 만들어졌고 높은 완성도를 가졌다고 보여진다. 

관람자가 성인 남성이라 그런지 - 여자들이 보기에 편협한 시선일 수 있겠지만 - 영화는 성장기 속 소녀가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신비로운 어린 여성이라기보다 철부지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순수하면서도 외롭고 치기어린 청소년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 캣 코너는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나는 일상 속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쿨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받아들였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눈폭풍같은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는 하얀 벌판에서 그 의미나 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의 따스함만으로 눈 속에서 묻히는 하얀 새같은 존재였다는 걸 묘사한다. 그런 소녀를 일깨우는 건 스스로도 알 지 못하는 내면에서 가끔씩 보여주는 꿈들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사주팔자가 있다. ^^;;) 

WRITTEN BY
리컨
영화를 즐기는 취미를 기록한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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