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퇴근길에 어머니 댁에서 놀고 있던 조카를 챙겨오라는 특명(?)을 받고 곧장 노원으로 향했다. 

조카녀석을 근래 들어 응석과 투정이 늘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와 있으면 더욱 심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도 데리러 갔더니 TV에서 나오는 만화를 다 보고 가겠다며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다. 

되도록이면 화를 내지 않는 게 좋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응석받이가 될 조짐이 보이니 아무래도 엄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됐다.

몇 번 주의를 주고, 한 두시간 쉬면서 기다려 줬지만 태도에 변화가 없어 결국 풀이 죽은 녀석을 억지로 데리고 나왔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많이 온순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습관이 잘못들면 대책없이 엇나갈 것이라고 생각되기에 데리고 가는 내내 실망과 비난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전철을 타자마자 졸려고 하는 조카의 모습에서 그냥 끝내서는 안되겠다 싶어 꾸벅거리는 녀석을 일부러 서서 가게했다. 물론 옆에서 붙잡아주기도 하고, 자지 못하도록 깨우기도 했다. 

자꾸 뭉그적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눈치가 너무 빤히 보여 끝내는 마을버스 타는 곳을 지나쳐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비록 날씨는 추웠지만, 바람이 불지 않았고 둘 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데다 배도 든든하니 한 40여분 정도 걷는다고 큰 탈이 날 것 같지는 않았다. 

중간에 제법 높이가 있는 언덕길이 있기는 하지만, 그쯤에서 잘못했다고 사과하거나 힘들다고 징징댈 때 적당히 마무리 짓고 싶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거기까지 걸어가는 동안 조카가 생각을 좀 많이 하길 바랬다.

마을버스를 타버리면 앉아서 대책없이 졸아버리는 비장의 기술을 조카녀석이 가지고 있어서 그냥 넘어간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이번에는 좀 오래 기억되도록 얼굴에 찬바람을 맞게 하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정거장 서너개 거리를 지나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데, 눈을 마주칠 때마다 얼굴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어떤 때는 '이제 그만하죠?' 하는 식이고, 어떤 때는 '졸린데 언제까지 걸어갈꺼야?' 하는 식이었다. 

결국, 언덕길을 다 올라와서 바람이 조금 불기 시작하자 울먹이며 춥다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이제는 됐다 싶어 훈계를 시작했고, 지켜지지는 않을 약속이지만 그래도 오래 기억에 남도록 조곤조곤 뱉어내도록 했다. 

그뒤로는 안아주기도 하다가 같이 걷기도 하면서 집에 도착했다. 

문제는 그 다음날 출근하니 다리가 좀 피곤한 편이고 감기기운이 약간 도는 듯 했는데, 조카 녀석은 별 탈없이 쌩쌩했다는 점이다. 하는 짓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조금 더 오래 기억되도록 혼내주겠다고 찬바람 맞으며 같이 걸었는데, 징징대던 조카보다 더 피곤하니 뭔가 허망했던 하루였다. ㅡㅡ;; 

WRITTEN BY
리컨
영화를 즐기는 취미를 기록한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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