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원정기 중에서 유일하게 카이사르가 쓰지 않은 부분이다. 갈리아 전쟁의 상황을 살펴보는 재미 외에도 당시를 살았던 카이사르와 다른 이의 문장을 비교해 볼 수 있어 좋다. 히르티우스는 카이사르의 측근 중 한 명으로 해방노예 쯤으로 기익된다.


히르티우스의 머리말

같은 카이사르의 측근 중 한 명인 발부스에게 카이사르의 뜻에 따라 저서의 나머지 부분을 쓰게 됐다는 얘기를 전한다.



비투리게스족, 카르누테스족, 벨로바키족의 반란 ( 기원전 52 ~ 51년 )

갈리아 전쟁 내내 갈리족들이 그랬듯이, 로마군의 병력이 많지 않은 것을 빌미삼아 사람들을 충동질하는 인물들이 아직 몇몇 남아 있어 이들을 마무리짓고 있다.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지만, 대개의 제국주의가 그러하듯 마지막은 엄하고 확실하게 다뤄두려고 한다.



마지막 교전 : 욱셀로두눔의 함락 ( 기원전 51년 )

공성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성 안의 방어태세와 병력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방어가 허술한 부분이 있다면 적이 모르게 그 부분을 가장 짧은 시간에 점령한 후 파고 들어가는 것이 기본으로 보인다. 대개 적이 성 안으로 숨었다면 아군의 전력이 강한 것이고, 침투경로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으로 방어가 견고하다면 성 안의 물자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먹을 것이든, 물이든 혹은 질병이든 성 안의 군사와 일반인들을 동요시킬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확인한 후 농성전에 대비해야 한다. 카이사르는 이곳에서 물의 공급을 차단해 승리한다.

카이사르 이전 세대로 로마와 이탈리아를 10년간 유린했던 한니발이 공성전에 약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비교해 볼 만 한다. 한니발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명장이다.



내란의 먹구름이 드리우다.

로마의 귀족들이 카이사르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했다는 정보까지 파악되자 카이사를 별 수 없이 로마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내전을 피하기 위해 여러 의견을 로마 원로원에 제안하지만, 끝내 거절당하자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된다.



조만간 " 내전기 " 를 읽어봐야겠다. 거침없던 카이사르조차도 " 내전기 " 에서는 그 속내를 전부 드러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문장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혹은 읽는이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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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원정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베르킹게트릭스와 맞붙은 알레시아 공방전이다. 8만여명의 다수임에도 구석에 몰려 있던 베르킹게토릭스는 전 갈리아지역에 기병대를 보내 약 24만명의 대군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군의 후방에서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로마군은 후방에 병력이 집결되는 동안 베르킹게토릭스를 압박하면서 높은 방어시설들을 구축해 길게 늘어뜨려놨다. 비교적 고지대에 보루까지 갖추긴 했으나, 숫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열세인데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됐으나, 끝내 버텨냄으로써 오랜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략가 혹은 무장으로써의 능력이 출중함에도 명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모습들 때문이기도 한데, 다른 천재적인 전략가들이라면 평야로 유인해 회전을 벌여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주거나 조직적인 모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적에게 안겨줄테지만,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부하들의 전투력에 의존하는 듯한 모습이 종종 보였다. 이는 기존의 명장들과 달리 정치적인 요소 혹은 계략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고, 적들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거나 갈리아 특유의 자유분방함으로 인해 어수선하게 전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자신의 승리를 너무 드러내지 않지만, 실수도 굳이 감추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7권은 이 알레시아 공방전이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로 진행됐으며,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보여준다.




서막 ( 기원전 52년 )

카이사르가 로마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인해 부산한 틈을 타 갈리족은 슬금슬금 반란을 준비한다. 그 와중에 베르킹게토릭스가 갈리족의 리더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해마다 당하고도 또 일어나는 갈리족의 자유정신(?)은 인정해 줄 만 하다. ^^;;




아바리쿰의 포위와 함락 ( 기원전 52년 )

베르킹게토릭스는 로마와 정면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자고 했는데, 말 안듣던 갈리족으로 인해 아바리쿰에 갇혀 게기다가 도망친다. 이 일로 베르킹게토릭스는 리더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게르고비아에서 로마군이 패하다 ( 기원전 52년 )

카이사르는 지휘관으로써 전세를 냉철하게 판단한 뒤, 겁만 주고 후퇴할 것을 지시했으나, 도망가는 적들을 보고 로마군이 미친듯이 싸우는 바람에 도리어 패퇴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부하들을 더욱더 장악할 수 있게 됐다.




베르킹게토릭스가 야전(野戰)에서 패하다 ( 기원전 52년 )

한번 로마군을 물리쳤어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던 갈리족이 카이사르의 부관인 라비에누스와 붙었다가 깨진다. 다시 말하지만, 전쟁터에서는 카이사르 못지 않았던 부장이자 동년배인 라비에누스다. 갈리아 전쟁에서 유일하게 카이사르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쉬운 건 나중에 벌어진 로마의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떠나 폼페이우스의 편에 가담한다는 점이다. ㅡㅡ;;



알레시아의 포위와 함락 ( 기원전 52년 )

상식적으로는 정말 무식한 작전이 아닌가 싶지만, 어쨌거나 갈리족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항복한다. 나름 지형적으로 높고 튼튼한 방어진을 구축했다고는 하지만, 숫적으로는 엄청난 열세인데다 앞뒤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되는 형세였다. 게다가 갈리족이 무작정 공격한 것이 아니라 방어진 중 가장 약한 쪽에 집중하기 위해 전담팀을 따로 짠 후에 그곳을 돕지 못하도록 전체적인 공격을 진행했음에도 무너뜨리지 못했다. 전술적으로는 뛰어나지 못했을지 몰라도 로마군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장악하는 능력에서 카이사르를 따라올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이후에 로마에서는 20일동안 감사제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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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베리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3년 )

카이사르와 라비에누스의 활약상이 정리되어 있다. 트레베리족을 평정하는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사용한 유인책을 똑같이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단지 연설할 때 내용만 다를 뿐이었다. " 여러분은 우리 사령관인 카이사르에게 그토록 자주 보여주던 것과 같은 용기를 지금 지휘관인 나에게도 보여주시오. " 라고..




두 번째 라인 강 도하 ( 기원전 53년 )

게르마니아는 일부 부족들에게만 로마의 영향이 퍼진 상태라 여전히 갈리족의 내분을 틈타 병력을 보내고 있기에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라인강을 건너려고 한다.

두 번째 도하인지라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여러 풍습과 문화를 기록해 뒀는데, 제법 재밌다.


갈리족의 관습과 제도

싸움을 하는 기사 ( 혹은 전사 ) 계급과 종교를 주재하는 드루이데스 ( 혹은 드루이드 ) 들이 존중받는 계급이며 그밖에는 별반 차이없이 고달팠다고 한다. 미신이 유행했음에도 아폴로, 마르스, 미네르바 등의 신들을 숭배했고, 그 중 메르쿠리우스가 으뜸이었다고 한다.

갈리족은 자신들이 모두 " 디스 " 라는 한 아버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는데, 디스는 저승의 신 플루토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게르마니족의 관습과 제도

싸움 잘하기로 유명한 게르마니족은 우유, 치즈, 육류를 주로 섭취하고, 주변에 넓은 황무지를 갖고 있는 게 자랑이었다고 한다. 성문제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단다.

두 뿔 사이에 또다른 거대한 뿔이 있다는 소와 엘크라고 하는 넘어지면 못 일어나는 동물, 그리고 난폭한 들소를 봤다고 카이사르는 주장하는데, 제일 처음 말한 동물이 아마 유니콘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으나, 비현실적인 얘기라 카이사르가 오해했을 것이라는 게 더 상식적으로 보인다.




에부로네스족의 나라를 초토화하다 ( 기원전 53년 )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말했다. 전쟁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고, 운도 전쟁의 큰 요소 중 하나라고. 오늘날에도 통용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에부로네스족과의 전투는 멋진 지휘보다는 난잡한 세력싸움에 가까웠다. 카이사르는 주변의 우호적인 부족들과 자신의 주력부대를 동원해 가능한한 넓은 지역에서 에부로네스족을 괴롭혔는데, 그 빈틈을 뚫고 다른 외부세력이 로마군의 기지를 급습한다. 로마군 스스로 겁에 질렸다는 표현이 이곳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아마 이때가 신입으로 들어온 병사들이 가장 많은 때로 보인다. 카이사르는 기지로 돌아와 기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만 지적한다. 그밖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신참들이라 주력병력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두 번째 라인강 도하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났다. 신참들의 병사를 좀 잃기는 했어도 나름 전쟁경험을 쌓았고, 정보도 많이 수집했으며, 게르마니족의 영토를 초토화시키며 위세를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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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브리탄니아 원정 ( 기원전 54년 )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제대로 준비하고 영국 ( 브리탄니아 ) 으로 들어가 한바탕 점령전쟁을 벌인다. 영국해협을 건너가기 전에 언제나 그렇듯 갈리아족은 말썽을 일으키는 데 이번에는 유력한 부족장이었던 아이두이족의 둠노릭스였다. 땡깡부리며 도망다니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온 얼마되지 않은 시점부터는 대개 갈리아의 반란에 대비하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부족에 대해서는 인질 겸 정보원 겸해서 부족장들이나 유력인사들을 군대와 함께 데리고 다녔다.

두번째 브리탄니아 원정에서 주된 상대는 캇시벨라우누스였다. 브리탄니아에서도 이번에는 제법 뭉쳐서 저항했지만, 야만족들의 치명적인 약점인 분열은 언제나 발목을 잡았다. 로마군은 또 새로운 형태의 전투경험을 쌓았다.

이번 장에서는 카이사르가 지리학적인 오류를 많이 범했기에 일분 연구자들은 이 부분이 가필(?)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단다.




사비누스의 부대가 에부로네스족에게 대패하다. ( 기원전 54년 )

" 이런 일은 대개 전투가 벌어지고 나서야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

아마 갈리아원정기에서 마지막 대전투 ( 알레시아 공방전 ) 를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입은 어이없는 사건이 아닌가 싶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갈리아 부족장의 속임수에 넘어가 참모진과 주요 백인대장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지를 벗어났다가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자기도 죽게 된다.

여러 모로 ' 역시 바보는 혼자 죽지 않는구나 '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데, 적들이 습격하는 와중에도 지휘관급들은 방어진을 구축하거나 기지로 돌아가는 등의 필요한 행동들을 하는데, 사비누스는 이때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다가 갈리아 부족장에게 협상을 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만나러 갔다가 불쌍한 죽음을 맞이한다. 베테랑 지휘관들은 행군 중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이미 깨우치고 있었으나, 가장 우두머리인 사비누스만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정보는 중요하지만, 적이 자진해서 알려주는 정보의 경우에는 몇 번의 검증을 거친 후에 믿고 활용해야 한다. 게다가 사비누스는 지휘관으로써 정말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바로 어떤 결정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려는 자세였다. 그 바람에 참모진과 백인대장들이 마지못해 따라나섰다가 이 꼴을 당한 것이다.




네르비이족이 키케로의 월동 진지를 공격하다. ( 기원전 54년 )

좋은 군대란 한 부대의 실수가 다른 부대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점도 그 특징 중 하나다. 사비누스보다 열악한 조건에서 갈리아 측은 똑같은 속임수를 퀸투스 키케로 ( 아마 유명한 정치가였던 키케로의 동생이거나 자식이었던 ) 에게도 구사했으나, 그는 로마인다운 방식으로 거절했다. 그 방식이란 무장한 적과는 타협하지 않는다인데, 협상은 적을 무찌른 후에 진행한다는 것과 함께 전쟁터에서는 아주 현실적인 구호가 아닐까 싶다.

이 계략이 실패하자 갈리아측은 로마군의 공병술을 곁눈질해 배운 실력으로 공성탑을 쌓고 포위공격을 감행한다. 키케로의 부대는 최선을 다해 버텨내는데, 이때 재밌는 백인대장 둘이 등장한다. 티투스 풀로와 루키우스 보레누스인데, 서로 용맹을 뽑내고 우의를 다진다. 이들이 재밌는 이유는 HBO 미니시리즈 드라마인 " 로마 ( Rome ) " 의 주인공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로마의 내전기 이후부터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집권하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두 캐릭터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등장했고, 드라마를 이끌어가는데, 제법 웃기기까지 한다. 이 미드는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훨씬 재밌다. ^^;;

우여곡절 끝에 이 소식을 듣게 된 카이사르는 숫적 열세를 속도와 유인술로 극복해 적들을 물리치고 아군을 구해낸다.




갈리아의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르다 ( 기원전 54 ~ 53년 )

퀸투스 키케로는 약한 체력에도 현명한 판단력과 의지로 위기를 극복했지만, 사비누스가 저지른 실수와 갈리아 부족 특유의 자유로운 오해(?)로 인해 대부분의 지역에서 위기가 고조된다. 로마군에서 유일하게 카이사르와 동급의 전투력을 지닌 라비에누스는 지휘관다운 처신을 하는데, 적들의 위협에 차분히 대처하다가 약한 틈을 타 적군의 대장만 집중적으로 노려 죽여버린다. 그러자 대개의 갈리아 부족들이 그러하듯 남은 병사들은 흩어져 버린다.




5권 두번째 반란에서도 로마군의 장기가 돋보이는데, 정보를 공유하는 과정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이 정보를 활용하는 모습이다. 카이사르는 직접 가야할 일과 맡겨도 될 일에 대한 판단이 분명하고, 판단이 섰으면 주저없이 움직였다. 그의 믿음직한 부하들은 언제나 카이사르를 믿고 신뢰했으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대개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다. 5권은 주로 로마군들의 위기들이었지만, 극복해 내는 모습들을 보고 배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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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페테스족과 텡크테리족을 도륙하다 ( 기원전 55년 )

갈리아 지방으로 넘어온 야만스런 게르마니족을 크게 무찌른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갖은 꼼수를 부리던 게르마니족은 카이사르와 로마병사들의 분노를 사 끝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궤멸되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카이사르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는 자신들이 융성했을 때 괴롭히고 약탈했던 갈리족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야만족들 사이의 어리석은 관계를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 라인 강 도하 ( 기원전 55년 )

라인강을 넘어서 게르마니족에게 위세를 떨치려는 카이사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라인강 도하는 서양학자들에게 여러 관심사를 제공했는데, 그 중 어떻게 그런 짧은 시간동안 다리를 만들어 통과할 수 있었나 하는 점이었다. 몇년 전에 재현에 성공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세한 건 읽는이가 확인했으면 한다. ^^;;


첫 번째 브리탄니아 원정 ( 기원전 55년 )

드디어 영국이 역사에 등장한다. 카이사르가 브리탄니아로 건너갔다가 고생한 얘기가 나온다. 배도 부서지고, 식량도 부족했고, 처음보는 야만인들의 전투스타일에도 애를 먹었지만, 무사히 갈리아 지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야만적인 갈리족들 중 일부는 로마병사들이 전리품을 노리고 습격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당연히 따끔하게 보복한다.

로마인 이름 중 정말 특이한 이름 한개를 발견했다. 아마 전통적인 로마인은 아니었을 테고, 다른 부족이었다가 로마인으로 편입된 인물로 보여진다. 아마 이때까지는 로마시민권을 획득하는 게 엄청난 혜택이었을 것이다. 로마시민권자가 로마가도 ( 도로 ) 를 따라 여행을 하다가 습격을 당한 경우, 로마군이 이를 알게 되면 보복을 감행했기에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득이 있었다. 돌아와서 사람이름이 이래도 되나 싶은 로마인의 이름은 " 루키우스 아우룽쿨레이유스 콧타 " 이다. 도대체 어디서 살던 인물일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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