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냄새가 구수할 때도 있지만, 지독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오세영 단편집 " 부자의 그림일기 " 가 딱 그렇다. 이두호 님의 " 꼬꼬댁 " 에서 되살아난 순박한 만화들을 찾다가 발견했는데, 이제는 만나기 힘들어진 어두운 시대의 우리네 지독함, 혹은 한의 정서가 묻어나는 만화다. 

" 부자의 그림일기 " 라고 해서 자본주의나 경제에 관한 만화라고 착각하지는 않길 바란다. 일제 해방기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서민들이 겪었을 법한 사건들을 치밀한 묘사와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단편 만화를 그려오다 모아서 낸 책이다. " 부자 " 는 단편선 마지막에 등장하는 국민학교 ( 이때는 국민학교였다. ) 여학생의 이름이다. 

허영만 님의 " 오! 한강 " 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장편인 " 오! 한강 " 에 비해 " 부자의 그림일기 " 는 단편집이라 여러 시선과 형식으로 시대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왠지 허영만 작가와 몇 번 같이 작업하신 적이 있는 듯한 그림체다. 

특이하게도 " 월북작가 단편선 " 이란 단락으로 몇 작품이 나와있다. 월북한 만화가이신지 아니면 월북한 소설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문학작품들에서 맡을 수 있는 묘한 냄새가 있다. 

해설부분이 제법 잘 되어 있는데, " 오세영 " 이란 작가를 정말 좋아하는 분으로 추측된다. 각 단편마다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준다. 

만화평론가 선정 해방 이후 좋은 우리 만화 4 위에 올랐다는 데, 이런 짓 좀 안했으면 좋겠다. 그냥 주제별로 10선 정도면 봐줄 만 할텐데 옛적 어르신들은 꼬박꼬박 순위를 매기고 있다. 그럴꺼면 1, 2, 3 위도 꼭 밝혀주길 바란다. 


고샅을 지키는 아이. 1990년 12월 발표

정말 우리나라 그래픽 노블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만한 수준인데, 원래 칼라인듯한 작품을 흑백으로 다시 인쇄한 듯 보여 이래저래 아쉽니다. 그렇다고 그림체가 아주 뛰어나리라 지레짐작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텍스트, 그림, 컷과 연출로 완성도가 아주 충만한 짧고 강렬한 단편이다.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인데, 나레이션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 아이가 운다

달래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도
아이는 사립문에
한쪽 등을 기대고
느껴 운다. 

담장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소꿉들이 손바닥을 반짝이며 
아이를 부르고

매듭 하나를 놓친 고무줄이 
바지랑대 발목에 
매달려 안타깝게 
친구를 찾미나

아이는 흑흑흑
고샅만 지킨다. ...


도입부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향 냄새가 한껏 밀려오는 느낌이다. 도시로 떠나 버린 이웃들과 달리 고향을 지키며 하루를 살아가는 여자 어린이의 풍경을 담아냈다. 한껏 고즈넉해지는 만화다. 


불. 1988년 8월 발표

성인용 만화인데, 우리나라 만화치고 이렇게 참담한 느낌을 주는 작품은 드물지 않나 싶다. 1980 ~ 90 년대에는 간간이 접할 수 있는 스타일이었는데, 요즘은 보기 힘들어졌다. 가난에 찌든 부부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애증을 어린 소년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소년에게 전해진 불(?)의 이미지에서 마음 한 구석이 콱 막혀 온다. 마지막 컷은 섬찟.

 
탈출. 1990년 9월 발표

도시인의 우울함을 보여줬는데, 시기적으로 일렀던 것 같다. 게다가 비슷한 시도는 많이 본 적이 있어 별로 와닿지는 않는다. 마지막 몽상과 현실의 혼동에 임펙트가 있다. 

 
최루. 1990년 6월 발표

인민군에게 죽은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 반공의식이 심어진 주인공이 대학에 들어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아들을 보게 되면서 멘탈이 붕괴되는 클라이막스에 이르게 된다. 분량의 대부분을 주인공이 살아온 세월을 묘사하다가 막판에 만나게되는 현실을 그리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예전에는 전형적인 전개였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이 어필하는 반전의 묘미가 있다. 

 
쏴! 쏴! 쏴! 쏴! 탕. 1988년 9월 발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가려진 배경으로 사용하여 맛이 간 주인공을 주변 사람들의 나레이션으로 풀어가는 작품. 군인으로 광주에 내려갔던 청년의 죄의식 혹은 해방을 그리고 있다. 

 
땅군 형제의 꿈. 1989년 10월 발표

열심히 살던 땅군 형제가 운좋게 백사를 잡아 출세하는 어중이 떠중이 땅군의 모습을 따라 하다 좌절하는 스토리. 좀 허무하다. 
 
 
김 노인 경행록. 1989년 8월 발표

노인 문제를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구성한 작품도 드물다. 폐지 줍는 청년이 상가집 근처에서 발견한 노인의 글을 읽는데, 그 내용을 그리고 있다.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어른의 소박한 삶과 노인들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표현이 재밌다. 

 
목론. 1989년 11월 발표

껍씹는 소리로 작품 전체를 도배했다. 느낌이 오지 않는가? 꼴불견 인간의 관찰기다. 전철 안에서 한 진상의 모습을 정말 지긋지긋하게 그려주고 있다. 지하철 안의 진상들은 지금에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투계 - 안회남 원작. 월북작가 단편선. 1993년 4월 발표.

월북작가의 원작이 있다고 해서 지주에 대한 저항이나 그런게 있으리라 지레짐작하지 말길 바란다.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직후에 있을 법한 시골 한량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투계는 소심하고 정신머리 없는 한 집안의 가장이 보여주는 화풀이를 그리고 있다. 그때도 이런 어른들이 무지 많았던 모양이다. 
 
 
복덕방 - 이태준 원작. 1993년 1월 발표.

시골 어르신들이 티격태격 싸우며 한 세월 살아가는데, 한 주인공이 돈 욕심에 눈이 멀어 투기를 했다가 자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먼저 보낸 친구에 대한 애틋함이 남아 있는 어르신들이 안쓰럽다. 

 
말 - 안회남 원작. 1993년 5월 발표. 

복잡한 상징성이 난해하다. 징용 갔다 돌아온 주인공이 마을 언덕에 묶여 있는 말 한필을 바라보며 온갖 번뇌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별 쓸모없는 말인데,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인 갈등, 억압의 상황마다 말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그냥 잡아먹든가.. ㅡㅡ;; 

 
낡은 쇠가죽 쌈지 속의 비밀. 1990년 9월 발표.

이 단편집에서 " 불 " 과 함께 집요함, 어두움, 오싹함을 대놓고 드러내는 작품. 그럼에도 엔딩은 서글프다. 통일에 대한 은근함 염원을 담고 있다. 

 
부자의 그림일기. 1989년 9월 발표.

국민학교 2학년 10반 " 나부자 " 학생의 가난 속 고군 분투기. 찌그러지게 가난하던 시절에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아가는 홀어머니와 " 나부자 " 의 일기장 속에 묻어나는 극빈자의 고통과 분노가 들어있다. " 나부자 " 는 있는 그래로 보여주지만, 읽는 이는 분노한다. 

부자의그림일기
카테고리 만화 > 역사만화
지은이 오세영 (글논그림밭,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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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이렇게 시대적 상황, 정서를 잘 기록해 둔 만화는 드물다. " 오세영 " 님의 그림체는 개발도상국 어설픈 도시 모습과 인간 군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스타일로 보인다. 이쁘게 그리지도, 못 그리지도 않았지만 그림체에서 뭔가가 느껴진다. 정식 그림 교육을 받지 않으셨다는데, 그럼에도 작품의 완성도는 모두 높게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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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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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위쪽, 이탈리아와 불가리아 사이에 " 보스니아 " 라는 곳이 있다. 그 보스니아에서 오른쪽 아랫동네에 " 고라즈데 " 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만화의 주무대인 이곳은 한때 UN 에 의해 " 안전지대 ( Safe Area ) " 로 선포됐던 곳이라고 한다. 그 " 안전지대 " 라고 불리던 시절에 그곳에서는 인종청소가 자행됐다고 한다. 버젓이.. 

뜨문뜨문 보게된 영화광고나 다큐멘타리를 통해 보스니아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이 저질러졌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화면을 통해 제대로 보면 속이 뒤틀릴 듯 해서 일단 미뤄뒀는데, 만화로 볼 기회가 생기니 일단 펼치게 됐다. 

" 팔레스타인 " 쪽 얘기도 갑갑했는데, " 보스니아 " 쪽도 만만치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서로 싸우는 이들이 한때는 한 마을에서 이웃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너무 복잡하다. ㅡㅡ;; 

어느날부턴가 하나둘씩 세르비아계 사람들이 사라지더니 갑자기 총을 들고 나타났단다. 어릴 적에 막내 아들과 함께 와서 저녁식사를 하곤 했던 동네 청년이 군복을 입고 자신들에게 총질을 하는 모습을 봤다는 어떤 나이지긋한 분의 얘기가 기억난다. 

UN과 미국, NATO 등이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동안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갔다고 한다. 딱히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자원이나 실리가 없이 명분만 있는 곳에서는 별다른 기대를 할 수 없는 조직들로 보여진다. 그나마 테이턴 합의안으로 이끌어내 이미 황폐해진 지역을 안정화시킨 건 인정해야겠지만서도.. 

언제나 그렇듯 경제적인 문제가 실제적인 원인이고, 비인간적인 인종주의는 핑계에 불과하며, 제어하지 못하는 정치적인 상황은 그곳에 기름을 부어 전쟁이라는 대참사를 일으킨다. ( 시대적 배경, 민족구성, 사회적 배경에 대해 별다른 사전지식이 없는 관계로 이 정도로 이해되는데, 지은이는 양심의 기록자로써 당시 상황을 분석하기 보다 그런 처참한 시간 속에서 살아남았던 이들의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만화 속 조 사코의 모습에서 많은 감정이입이 생기곤 한다. 

고라즈데_책표지

출처 : DAUM 책



http://en.wikipedia.org/wiki/Joe_Sacco 

이 책에서는 " 코믹 저널리즘 ( Comic Journalism ) 의 선구자 " 라는 소개가 있는데, 아무래도 콩글리쉬가 아닌가 싶다. 

http://en.wikipedia.org/wiki/Comics_journalism 
위키피이다에서 찾은 " 코믹스 저널리즘 "

http://www.kcomics.net/Codic/search_view.asp?scidx=1016  
디지털 만화 규장각 이라는 우리나라 사이트에서 찾은 " 코믹 저널리즘 " 

어쨌거나 간단하게 말하면 만화로 표현한 저널리즘 정도 되는데, 이게 좀 생각해 볼 만 하다. 

저널리즘에는 기본적으로 양심을 향한 호소가 들어있다. ( 그밖에도 많은 것이 들어있지만 ) 그 호소의 방법으로 기사, 사진 등이 주를 이뤘는데, 코믹스 저널리즘은 그 절충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기사보다는 재밌고, 사진보다는 다양한 표현력을 갖출 수 있다고 보여진다.

저널리즘 기사에는 기자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들어있을 수도 있지만, 감상이 들어간다면 좀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만화의 형태를 띄고 있다면 왠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게다가 만화는 기본적으로 스토리를 갖추고 있어 전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수월하다. ( 물론 만화도 그 장르에 따라 스토리가 없이 설명만을 이루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스토리를 갖추고 있다. ) 

저널리즘 사진은 아주 강렬하지만, 실제 모습 속에서 카메라로 담아내는 것이라 인물과 배경 등이 원하는 대로 배치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사진 기자는 엄청난 기다림 속에서 감이 왔을 때 미친 듯이 찍어내서 훌륭한 작품 하나를 건져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화의 형태를 띄게 되면 이보다는 유연하다.

대강 기억해 뒀다가 그들의 생활상을 한군데 모은 후, 인물이나 사건이 보여주는 메인테마를 어느 정도 담아 사실적인 부분과 메시지의 부분을 같이 그려낼 수 있다. 물론 사진보다는 덜 강렬하지만, 스토리를 통해 담아낸 내용들이 머리 속에 쌓이게 되면 어느 정도의 표현력만 있어도 임펙트가 생겨난다. 

게다가 저널리즘 사진에서 담기 어려운 부분들 - 피해자이면서도 별로 동정받기 어려운 사건이나 인물들 - 에 대해서는 우회적으로 비교적 쉽게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분명 객관적인 시선임을 암시할 수 있어 좋다. 

코믹 저널리즘이라는 표현이나 르포 문학 ( 기록 문학 ) 으로서의 만화라를 표현이 혼동스럽긴 한데, " 고라즈데 " 는 이 두 부분을 모두 담아낸 작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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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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