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인 기질이 엿보이는 감독은 아주 무례하면서도 실험적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마케터는 " This Must Be The Place " 라는 원제를 " 아버지를 위한 노래 " 라는 한국인들이 알아듣기 쉬운 제목으로 바꾸었다. 이해하기 쉬운 (?) 제목 덕분에 영화 내용은 배나 짜맞추기가 힘들었다. 118분이라는 러닝 타임 속에 절반 이상을 확신없이 봐야했고, 보고 나서도 한참을 다시 더듬어야 했던 아마추어의 입장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 

전체 스토리는 간략한데, 감독이 미국식의 친절한 편집을 따르지 않고, 나 예술인이요 하는 식의 편집 - 불쑥 튀어나오는 컷, 이미지들의 충돌같은 느낌, 몽타쥬라도 재현할 듯한 기세의 화면들.. - 으로 인해 우리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아주 난잡해 보일 때가 많다. ( 담배피우던 그 아주머니는 과연 누구셨을까? ) 칸에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성적은 좋지 않은 전형적인 예술성을 띤 독립영화다. 

출처 : DAUM 영화



연기파 배우인 숀 펜이 파격적인 변신으로 영화에 큰 축을 담당하고, 마이클 번 ( 혹은 바이른 ) 의 음악이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스토리적으로 특이한 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도 되는가 싶을 정도의 반전(?)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분명 코미디이고, 드라마라는 건데, 아주 공감적(?)으로 반응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이 말은 나도 설명하기 힘들다. ^^;; 

거의 2시간 가까운 상영시간 동안 스토리나 설정을 머릿 속으로 정리하는데만 시간을 보내고 보니 영화에 대해 기록할 때도 기억에 남은 정리를 따를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 이후로는 영화 스토리에 관해 아주 많은 얘기를 할 것 같으니 참고했으면 합니다. )  




영화를 보기 전에 숀 펜이 등장한다는 것과 ( 프란시스 맥도먼드도.. ) 30년간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에 대한 잊혀졌던 사랑으로 아들이 나치에게 복수한다는 스토리라는 정도를 듣고 갔다.

앞부분은 100퍼센트 확실하지만, 뒷부분은 반만 맞췄다. 나치에게 복수를 하지만, " 셰이엔 " 이 아버지의 숨겨진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복수를 하는 게 아니다. " 셰이엔 " 의 아버지는 세상 모든 아버지들처럼 아들인 " 셰이엔 " 을 사랑했고, 아들 " 셰이엔 " 은 세상 모든 아들처럼 아버지의 복수를 한 것이다.

이런 사실에 -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고, 연연해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된다는 게 이 영화의 주된 메시지다. 그렇다.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성장스토리다. 




아버지의 사랑 

마초 영화는 아니지만, 남자에 대한 이중적이면서도 중요한 속성 하나를 드러낸다. 바로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습성이다. 남자 아이들은 곧잘 제멋대로 굴고, 스스로 뭐든 할 수 있을 듯 행동하며, 독립적인 성향을 드러내지만, 실제로는 커가면서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그런 아버지의 존재와 보호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남자 아이들은 아버지를 뛰어넘으려고 반항도 하지만, 실제로 그런 관계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 이중적인 면이 있다. 대개는 시간이 흘러 아들이 성장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데, 그 주요한 증거 중 하나가 바로 더이상 아버지에게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자식을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를 의심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 셰이엔 " 은 자신의 존재가치나 평가를 아버지의 사랑에 의존하는 강박증을 가진 50대의 철부지였고, 그런 그가 여행을 떠나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어 돌아오는 얘기다. 




아버지는 왜 나치를 쫓았고, 아들은 왜 아버지의 뒤를 이었을까?

30년간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가 느닷없이 죽어간다며 연락을 해왔고, 가보니 숙제만을 남긴 채 돌아가셨다. 주변 사람들 얘기로는 아버지가 " 세이엔 " 을 많이 생각했다고 하는데, " 셰이엔 " 은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다. 그냥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는지 확인하고 싶어 떠난 복수 여행이었다. 매번 실패하고, 좌절해가는 일상에 지쳐 이제는 정말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던 " 아버지의 사랑 " 에 대한 의심을 어떤 식으로든 결정짓기 위해 주인공은 길을 떠난다. 

아버지가 남긴 흔적을 따라 여기저기 낯선 사람들을 만나가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도 하고, ( 문신남과의 만남 등등) 난생 처음 해피엔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 자신이 쫓는 나치의 손녀와 그의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보기보다 중요하다. ) 

30년간 자신을 팽개쳐두고 나치를 쫓았던 이면에는 어떤 큰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90살이 넘은 나치를 만나게 된 " 셰이엔 " 은 마침내 충격적인(?) 비밀을 듣게 된다. 아버지가 다른 나치도 아닌 특별히 자신만을 쫓은 이유에 대해서다. 홀로코스트 수용소 시절에 이 나치가 개를 데리고 셰이엔의 아버지를 위협해 바지에 오줌을 지리게 만든 수치를 안겨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결국, 아버지가 가족을 내팽개치고 개인적인 복수를 쫓아 30년을 보낸 것이었다. ㅋㅋㅋ 셰이엔의 표정은 여행을 시작하게 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복수를 끝낸 후부터 제대로 웃기 시작하는데, 공항에서 유태인 리더 ( 주드 허쉬 ) 와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태인 리더는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네 얘기를 많이 했다며 주인공에게 농을 건네지만, " 셰이엔 " 은 시덥잖은 소리 말라며 웃어 넘긴다.

마침내 집착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버지의 나치 추적, 아들의 강박증은 결국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들의 집착이었던 것이다. ( 나도 벗어났다. 118분동안 무엇인가 중요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 극도의 긴장감에 버텼는데, 몸은 허탈해지고, 머리 속은 하얘졌다. ㅋㅋㅋ 사실 여기서 어느 정도 영화의 감을 깨닫기 시작했다. ) 

참고로, 나치 생존자의 늙은 아내가 주인공 " 셰이엔 " 을 처음에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가 헤어지면서 어디선가 본 듯 하다고 말하는데, 이 대사는 주인공 " 셰이엔 " 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직 성장하지 못한 남자 아이의 특징을 띠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상에서는 " 셰이엔 " 이 신분을 속이고 접근했기에 서로 만난 적이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럼에도 늙은 부인이 갑작스레 말을 바꿔 어디서 본듯 하다고 한 것은 부인의 심리적 불안이나 정신적 불안정이라기보다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복수의 하찮음.. 

남자들의 하찮은 집착들에 대표적인 게 바로 복수다. 자신의 치욕을 갚기 위해 30년을 보낸 아버지나, 나치를 700명이나 죽였다던 유태인 리더나, 그리고 주인공에게 차를 빌려주며, 자신을 배신하는 사람은 용서치 않겠다고 경고하는 인물을 보면 안다. 알고 보면 다들 유치하다. 모텔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조르던 유태인 리더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된다. 

이런 유치함을 대변하는 도구가 바로 " 셰이엔 " 이 나치를 만날 때 들고간 총이다. 이 총은 크고, 빛이나며, 아주 위력적으로 보이지만, 디자인이 유치하다. 평소 액션물이나 밀리터리물에서 총을 자주 봤기에 거슬리는 소품이 나오자 눈여겨 본건데, 결국 쏘지 않았다. 주인공이 인생을 깨닫고 성숙해져서 총을 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 인간사에서 남자들이 말은 뻔지르르하게 두고보자는 식의 말을 남기고 잊고 마는 한심한 습성을 대변한다고 느껴졌다. ( 부연하자면, 총이 가지는 의미가 그런 것이고, 복수 행위에서 총이 빠진 이유는 역시 아버지의 수준에 걸맞는 복수행위를 위해서라고 본다. ) 

함께 살펴볼 아이템이 바로 여행용 가방인데, 영화 끝에 화장과 함께 사라진다. 저걸 왜 끌고 다니나 싶게 굳이굳이 귀에 거슬리는 바퀴소리와 함께 항상 같이 다니다가 주인공이 성숙해지면서 없어져 버린다. 집착을 대변하는 소품이 아니었나 싶다. 





짖꿏은 감독의 성향.. 의도적이었을까? 

이 영화에는 실험적인 시도와 관객에게 특이한 자극을 주기 위한 편집이 많다. ( 도대체 뭘 바란건지 알 수는 없지만서도.. ) 게다가 아이들이 성급하게 뭔가를 보여주듯 갑작스레 전개되는 컷 ( 혹은 씬 ) 들이 많았다. 이런 요소들이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의 주제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와중에도 영화 초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내려오면서 주인공의 상황을 보여준다든가, 아버지의 연락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 전화줄이 팽팽해지며, 이제부터 긴장감이 발생할 것을 암시하는 장면 등은 비교적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게다가 블랙유머 혹은 블랙코미디를 제대로 구사했다. 부조리한 유머로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웃기게 만든다든가, 뭔가 웃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웃기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래서 관객은 더 머리를 굴려 영화에 몰입하게 해 적극적으로 만든다. ( 물론 흥미를 잃어버렸다면 아무 효과도 없겠지만.. ) 이 영화의 장르는 드라마와 코미디다. 

덕분에 관객들은 스토리를 쫓아가야 하는건지 떨여져있는 암시와 복선을 쫓아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씬마다 들어있는 듯한 메시지를 따라가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다. 영화를 본 뒤로 제대로 다 살펴본 건지 지금도 의심스럽다. ^^;;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홀로코스트

크게 히트한 영화가 아니니 유태인들의 항의는 없었을 것 같지만,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접근을 특이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치 생존자와 유태인 희생자를 나치로 인해 어린 시절을 잃어버려 성장하지 못한 남자아이들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둘 다 어린 시절의 악몽으로 인해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성인 남자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캐릭터로 등장시켰다. 

나치 생존자를 쫓는 인물이 역사적 사건과 책임의 무게보다 개인적인 원한을 더 중요시 여기는 건 참 받아들이기 힘든 비꼬기다. 다른 놈은 안 쫓고 오직 한 놈만 30년을 찾아 헤맨거다. ㅋ




연출에 축소된 연기력

숀펜이나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숀펜은 특히나 이 영화에 정성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는데, 유명 스타가 저예산 독립영화에 출연한 점이나, 주인공의 특징에 맞게 완전 분장한 모습, 그리고 힘없는 목소리와 어눌한 걸음걸이까지 등장하는 순간부터 노력한 티가 확 났다.

그런데, 감독이 워낙 연출이나 편집에 실험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하는 바람에 숀 펜의 연기력이 화면을 압도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거의 숀 펜 혼자 영화를 계속 이끌고 있음에도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숀 펜의 심리나 표현이 어땠을까 하는 점보다 감독이 도대체 뭘 말하려는거야 하는 생각이 더 많다. 

추측으로는 숀 펜 정도면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감독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을 위치일 것 같은데, 별로 그런 흔적들이 보이지 않는다. " 셰이엔 " 이 미국에 갔을 때, 데이빗 번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숀 펜이 돋보이게 하려고 더 길게 갈수도 있었던 부분이라고 본다. 



은근히 괜찮은 영화 음악

모던 토킹은 들어봤어도 토킹 헤드는 처음 들어봤다. 어떤 장르인지 참 설명하기 어려운데, 1970년대에 인기있었다고 한다. 영화 중간에 토킹 헤드 ( Talking Heads 니 토킹 헤즈라고 읽어야 하지 않나? ) 데이빗 번이 " This Must Be The Place " 를 부르는 데 상당히 인상깊다. ( 언제 그 처자는 천정으로 올라갔을 싶어 궁금했는데, 다행이 인터넷에서 영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 )  아마 가사를 해석해 보면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듯 한데, 이미 쓸 만큼 썼고, 음악 쪽은 별로 밝지 않아 관심있는 분들의 포스팅을 기대할 뿐이다. ^^;;;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독립영화에서도 이렇게 영화제목을 아주 잘못 짓는 경우는 드문데, 덕분에 두뇌를 풀가동하고, 영화를 다시 더듬어보는 짓까지 해야 했다. 영화를 다시 구성해 보면 말만 많아지는 스타일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한번 봤을 때 너무 엉켜있어 당최 감당이 안됐다.

다소 단정적인 영화평에 의심이 가서 한번 확인해 보고픈 관객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  

WRITTEN BY
리컨
영화를 즐기는 취미를 기록한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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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덱 슈피겔만은 1906년 10월 11일에 태어나서 1982년 8월 18일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아냐 슈피겔만은 1912년 3월 15일에 태어나서 1968년 5월 21일에 자살했다. 
블라덱의 아들인 리슈 슈피겔만은 태어난지 몇 해 되지 않아 죽었다. 
블라엑의 아들인 아트 슈피겔만은 유태인 아버지가 겪었던 피의 역사를 " 쥐 ( MAUS ) " 라는 만화로 옮겼다. 
그들의 이야기는 두 권의 만화책으로 끝났지만, 그 여운이 언제 사라질지는 알 수 없다.  


책표지

출처 : DAUM 책




1권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나치 시절의 유태인 학살에 관한 또다른 좋은 작품 정도로 비춰줬는데, 2권에서는 왜 걸작인지 납득할 만 했다.


속표지에는 블라덱의 첫번째 아들 리슈의 사진이 그대로 등장한다.
작품 중간에는 블라덱의 수용소 시절 사진이 삽입되어 있다.
유태인인 블라덱은 흑인이 자신들의 차를 얻어타게 되자 히스테릭하면서도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강하게 드러낸다.
블라덱은 " 쥐 2 " 가 완성되어가던 중에 사망했다. 아트 슈피겔만은 당시의 느낌도 만화에 그대로 넣어놓았다. 아트 슈피겔만은 분명 뛰어난 작가다.
그림체 역시 일부로 이런 스타일로 그려넣었다는 걸 다른 책을 통해 알게 됐다. " 쥐 " 의 그림은 화려한 효과보다 만화가 전개되는 공간의 감각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이런 스타일로 그렸다고 한다. 이 작품을 얼마나 제대로 소화한건지 스스로 의심스럽긴 하지만, 듣고 보니 정말 공감된다. ( 아트 슈피겔만은 자신의 작품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


MAUS II 여기서 나의 고난은 시작됐다. 

하나, 마우슈비츠 ( MAUSCHWITZ ) 

둘, 아우슈비츠 ( 시간은 흐른다, AUSCHWITZ ( TIME FLIES) )  

셋, ... 여기서 나의 고난은 시작됐다... ( ... AND HERE MY TROUBLES BEGAN ... ) 

넷, 구원되다  ( SAVED )

다섯, 다시 아냐에게 ( The SECOND HONEYMOON ) 

작품해설 - 조엘 개릭  

** 작품해설은 " 쥐 " 가 완간되기 전에 씌여졌지만 내용이 좋아 삽입되어 있다고 한다.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쥐2여기서나의고난은시작됐다
카테고리 만화 > 그래픽노블
지은이 아트 슈피겔만 (아름드리, 2007년)
상세보기


요즘 유태인들에 관한 이미지 혹은 소식이 아주 부정적이었는데, " 바시르와 왈츠를 " 이나 " 쥐 " 를 보게 되면서 그들에게도 자기반성의 역량이 충분히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우리나라는 아직은 모르겠다. ) " 쥐 " 는 정말 자기 얘기를 이렇게 객관적으로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냉정한 시선을 취하는데 그 바람에 역설적으로 더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생지옥에서 살아나온 유태인 아버지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닌 한계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왜곡없이 보여주고 있다. 유태인 학살 만행의 산증인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문제로, 가족 간의 문제로 들여오면서도 양쪽 다 흐트러짐없이 서술하고, 보여주고, 느끼게 해 준다. 

7천 여장의 스케치, 시퀀스 설정, 그림과 말의 배분이 300 여장에 농축되어있다. 1권에서 말한 영화적 편집 기법의 도입이란 것 같긴 한데,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덧붙이기 : 1권에 있던 " 지옥혹성의 죄수 " 편은 실제 어머니의 자살에 대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아트 슈피겔만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마약 등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었고, ( 한달정도? ) 정신적으로 너무 혼란스러웠기에 " 쥐 " 라는 만화를 통해 많은 부분을 해소하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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