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두꺼운 만화책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19 가지 우리나라 단편 소설을 800여쪽이 넘는 분량에 모아뒀다. 

언제나 소수의 명작들로만 출판되는 우리나라 리얼리티 만화의 수작이다. 오세영님의 전작인 " 부자의 그림일기 " 보다 만화의 내용, 그림체, 책의 완성도에서 훨씬 좋아진 모습이다. 몇 작품은 " 부자의 그림일기" 와 겹치긴 하는데, 별로 아쉽진 않다. 

전작과 달리, 이 책에는 작가의 글 ( 오세영 ), 원작소설에 대한 작품 해설 ( 고용우, 김동곤 ), 평론 ( 박인하 ) 그리고 본문속 말풀이가 등이 들어있어 훨씬 친절하고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작품 해설은 매 작품마다 작가에 대해 소개하고, 그 작품의 주제를 설명해주고 있고, 평론은 오세영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들어있다. 글로된 원작 소설을 만화로 최대한 되살리는 노력 ( 이를 " 번안 " 이라고 표현한다고 이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 의 진수는 역시 말풍선에 있다. 순우리말과 당시에 사용했던 단어들을 그대로 넣었기에 낯선 단어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본문 속 말풀이는 이에 대한 설명이다. 박인하님의 평론에 의하면 말풍선 외에도 원작 소설에서 묘사했던 내용을 그대로 컷에 옮겨 넣는 정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요새 사용해도 어감이 좋은 우리말들이 눈에 띈다. 

한국_단편_소설과_만남_표지

출처 : DAUM 책

그림체도 훨씬 발전된 모습인데, 출판물의 결과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네 어르신들의 터진 손바닥, 흙내 묻어나는 얼굴, 꾀죄죄한 옷차림, 구수한 입모양과 해맑은 미소는 이제 우리나라 만화에서 정말 희귀해져 버린 터라 더 와닿는 면이 있다. 

" 동백꽃 ", " 요람기 ", 메밀꽃 필 무렵 "  같이 교과서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익숙한 작품들과 월북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감춰졌던 여러 명작들을 만날 수 있다. 

19편 모두 소중한 작품들이지만, 그 중 몇몇은 평소 알고 있던 스타일이 아니어서 기억에 남는다. 

" 토성랑 " 이란 작품은 만화의 배경이 된 지역 이름이다. 서울 외곽에 지게꾼이나 걸인들이 움막을 짓고 모여 사는 곳이었다고 하는데, 그 분위기가 전통의 농촌풍경이나 다리 밑 거지들의 터전보다 훨씬 원시적인 모습을 띄어 충격적이었다. 젖가슴을 드러난 아낙이나 정신나간 할머니 등등이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나라 민족이 처했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농우 " 에서는 돈에 쪼들려 억압받던 농민이 억울한 일을 당해 매를 맞아야 하는 상황에서 민중이 힘을 모아 이를 뒤엎는 줄거리인데, 꿋꿋하던 주인공이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짠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고집센 가부장의 울분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 쇠찌르레기 " 는 어떻게 그릴 수 있게 됐는지는 몰라도 북한 조류학자를 주인공으로 분단의 아픔을 그리고 있는데, 북한 주민의 시선에서 얘기가 전개된다. 요즘 북한의 실상을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북한의 생활상이긴 한데, 정치적인 냄새가 거의 없기는 하다. 

" 맹순사 " 는 일제강점기에 순사 노릇을 하다가 해방 후 다시 순사로 들어가 보니 온갖 잡것들이 순사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기겁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경찰의 지금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 까마귀 " 는 좀 엽기적인데, 소설가 주인공이 죽음을 앞둔 어떤 여인을 만나게 되면서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당시 지식인들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여주인공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여인에게 사랑을 줘야겠다고 하는 발상이나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정혼자 ( 소설가가 아닌 ) 가 여인이 외롭지 않도록 여인이 토해낸 핏물을 반컵이나 들이켜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얘기는 절로 소름이 돋는다. 

진귀하고 리얼리티가 넘치는 만화를 접했다는 즐거움과 함께 암울한 사회상 속에 살아갔던 어른들의 모습이나 현실의 외면했던 시대인들을 보는 듯 해서 갑갑한 느낌이 찾아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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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냄새가 구수할 때도 있지만, 지독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오세영 단편집 " 부자의 그림일기 " 가 딱 그렇다. 이두호 님의 " 꼬꼬댁 " 에서 되살아난 순박한 만화들을 찾다가 발견했는데, 이제는 만나기 힘들어진 어두운 시대의 우리네 지독함, 혹은 한의 정서가 묻어나는 만화다. 

" 부자의 그림일기 " 라고 해서 자본주의나 경제에 관한 만화라고 착각하지는 않길 바란다. 일제 해방기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서민들이 겪었을 법한 사건들을 치밀한 묘사와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단편 만화를 그려오다 모아서 낸 책이다. " 부자 " 는 단편선 마지막에 등장하는 국민학교 ( 이때는 국민학교였다. ) 여학생의 이름이다. 

허영만 님의 " 오! 한강 " 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장편인 " 오! 한강 " 에 비해 " 부자의 그림일기 " 는 단편집이라 여러 시선과 형식으로 시대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왠지 허영만 작가와 몇 번 같이 작업하신 적이 있는 듯한 그림체다. 

특이하게도 " 월북작가 단편선 " 이란 단락으로 몇 작품이 나와있다. 월북한 만화가이신지 아니면 월북한 소설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문학작품들에서 맡을 수 있는 묘한 냄새가 있다. 

해설부분이 제법 잘 되어 있는데, " 오세영 " 이란 작가를 정말 좋아하는 분으로 추측된다. 각 단편마다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준다. 

만화평론가 선정 해방 이후 좋은 우리 만화 4 위에 올랐다는 데, 이런 짓 좀 안했으면 좋겠다. 그냥 주제별로 10선 정도면 봐줄 만 할텐데 옛적 어르신들은 꼬박꼬박 순위를 매기고 있다. 그럴꺼면 1, 2, 3 위도 꼭 밝혀주길 바란다. 


고샅을 지키는 아이. 1990년 12월 발표

정말 우리나라 그래픽 노블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만한 수준인데, 원래 칼라인듯한 작품을 흑백으로 다시 인쇄한 듯 보여 이래저래 아쉽니다. 그렇다고 그림체가 아주 뛰어나리라 지레짐작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텍스트, 그림, 컷과 연출로 완성도가 아주 충만한 짧고 강렬한 단편이다.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인데, 나레이션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 아이가 운다

달래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도
아이는 사립문에
한쪽 등을 기대고
느껴 운다. 

담장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소꿉들이 손바닥을 반짝이며 
아이를 부르고

매듭 하나를 놓친 고무줄이 
바지랑대 발목에 
매달려 안타깝게 
친구를 찾미나

아이는 흑흑흑
고샅만 지킨다. ...


도입부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향 냄새가 한껏 밀려오는 느낌이다. 도시로 떠나 버린 이웃들과 달리 고향을 지키며 하루를 살아가는 여자 어린이의 풍경을 담아냈다. 한껏 고즈넉해지는 만화다. 


불. 1988년 8월 발표

성인용 만화인데, 우리나라 만화치고 이렇게 참담한 느낌을 주는 작품은 드물지 않나 싶다. 1980 ~ 90 년대에는 간간이 접할 수 있는 스타일이었는데, 요즘은 보기 힘들어졌다. 가난에 찌든 부부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애증을 어린 소년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소년에게 전해진 불(?)의 이미지에서 마음 한 구석이 콱 막혀 온다. 마지막 컷은 섬찟.

 
탈출. 1990년 9월 발표

도시인의 우울함을 보여줬는데, 시기적으로 일렀던 것 같다. 게다가 비슷한 시도는 많이 본 적이 있어 별로 와닿지는 않는다. 마지막 몽상과 현실의 혼동에 임펙트가 있다. 

 
최루. 1990년 6월 발표

인민군에게 죽은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 반공의식이 심어진 주인공이 대학에 들어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아들을 보게 되면서 멘탈이 붕괴되는 클라이막스에 이르게 된다. 분량의 대부분을 주인공이 살아온 세월을 묘사하다가 막판에 만나게되는 현실을 그리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예전에는 전형적인 전개였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이 어필하는 반전의 묘미가 있다. 

 
쏴! 쏴! 쏴! 쏴! 탕. 1988년 9월 발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가려진 배경으로 사용하여 맛이 간 주인공을 주변 사람들의 나레이션으로 풀어가는 작품. 군인으로 광주에 내려갔던 청년의 죄의식 혹은 해방을 그리고 있다. 

 
땅군 형제의 꿈. 1989년 10월 발표

열심히 살던 땅군 형제가 운좋게 백사를 잡아 출세하는 어중이 떠중이 땅군의 모습을 따라 하다 좌절하는 스토리. 좀 허무하다. 
 
 
김 노인 경행록. 1989년 8월 발표

노인 문제를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구성한 작품도 드물다. 폐지 줍는 청년이 상가집 근처에서 발견한 노인의 글을 읽는데, 그 내용을 그리고 있다.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어른의 소박한 삶과 노인들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표현이 재밌다. 

 
목론. 1989년 11월 발표

껍씹는 소리로 작품 전체를 도배했다. 느낌이 오지 않는가? 꼴불견 인간의 관찰기다. 전철 안에서 한 진상의 모습을 정말 지긋지긋하게 그려주고 있다. 지하철 안의 진상들은 지금에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투계 - 안회남 원작. 월북작가 단편선. 1993년 4월 발표.

월북작가의 원작이 있다고 해서 지주에 대한 저항이나 그런게 있으리라 지레짐작하지 말길 바란다.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직후에 있을 법한 시골 한량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투계는 소심하고 정신머리 없는 한 집안의 가장이 보여주는 화풀이를 그리고 있다. 그때도 이런 어른들이 무지 많았던 모양이다. 
 
 
복덕방 - 이태준 원작. 1993년 1월 발표.

시골 어르신들이 티격태격 싸우며 한 세월 살아가는데, 한 주인공이 돈 욕심에 눈이 멀어 투기를 했다가 자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먼저 보낸 친구에 대한 애틋함이 남아 있는 어르신들이 안쓰럽다. 

 
말 - 안회남 원작. 1993년 5월 발표. 

복잡한 상징성이 난해하다. 징용 갔다 돌아온 주인공이 마을 언덕에 묶여 있는 말 한필을 바라보며 온갖 번뇌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별 쓸모없는 말인데,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인 갈등, 억압의 상황마다 말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그냥 잡아먹든가.. ㅡㅡ;; 

 
낡은 쇠가죽 쌈지 속의 비밀. 1990년 9월 발표.

이 단편집에서 " 불 " 과 함께 집요함, 어두움, 오싹함을 대놓고 드러내는 작품. 그럼에도 엔딩은 서글프다. 통일에 대한 은근함 염원을 담고 있다. 

 
부자의 그림일기. 1989년 9월 발표.

국민학교 2학년 10반 " 나부자 " 학생의 가난 속 고군 분투기. 찌그러지게 가난하던 시절에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아가는 홀어머니와 " 나부자 " 의 일기장 속에 묻어나는 극빈자의 고통과 분노가 들어있다. " 나부자 " 는 있는 그래로 보여주지만, 읽는 이는 분노한다. 

부자의그림일기
카테고리 만화 > 역사만화
지은이 오세영 (글논그림밭,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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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이렇게 시대적 상황, 정서를 잘 기록해 둔 만화는 드물다. " 오세영 " 님의 그림체는 개발도상국 어설픈 도시 모습과 인간 군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스타일로 보인다. 이쁘게 그리지도, 못 그리지도 않았지만 그림체에서 뭔가가 느껴진다. 정식 그림 교육을 받지 않으셨다는데, 그럼에도 작품의 완성도는 모두 높게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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