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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에서의 작전 실패 ( 기원전 57년 )

카이사르가 잠시 이탈리아로 간 사이에 알페스 ( 오늘날의 알프스 ) 의 고갯길에 세르비우스 갈바를 12군단과 함께 파견했는데, 이는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전투를 하지 않던 월동시기였는데, 갈리아 부족이 습격해와 전투를 치룬 후, 여건이 좋지 않자 갈바는 로마화되어 있는 속주로 이동한다. 여기서도 로마의 경험많은 중무장 보병들이 그 역량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갈리아족이 로마에 덤빈 이유가 잘못되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사실상 로마는 상인들의 교류나 속주의 안정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교통요지 혹은 방어를 위한 주요 지역을 점령해 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갈리아인들에 비해 관세를 조금 덜 받거나 야만적인 행위는 조금 덜해지긴 하겠지만,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이런 차이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카이사르는 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월동기간동안 갈리아를 떠나있거나 로마와 연락을 자주 취해야 했다. 당시 로마는 많은 수의 귀족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공화정이었는데,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해 먹고 살기 힘든 민중들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험난하고 피곤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복잡한 국내 정치도 조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군단도 전투를 통해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지시가 없어도 살아움직이듯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서양 연안 전투 ( 기원전 56년 )

오늘날의 영국 땅을 바다 건너로 바라보는 갈리아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를 얘기한다. 지중해의 잔잔한 바다에 적합했던 로마군의 배가 대서양의 험난한 바다에는 맞지 않았으나 로마군의 장점이었던 적응력 덕분에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삼두정치의 한 주역이었던 졸부 크라수스의 아들로 보인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이 청년을 매우 아꼈으며, 푸블리우스 크랏수스 역시 이에 보답할 만큼 뛰어난 인재였다고 한다. 갈리아 원정기에서 사람 이름 앞에 웬만해서는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데, 푸블리우스 크랏수스에게만은 여러 곳에서 " 젊은 " 이라는 단어를 일부로 붙인 게 그 증거라고 한다. 이후에 활약상이 좀 나오는데, 아쉽게도 아버지인 졸부 크랏수스가 파르티아 ( 소아시아 혹은 페르시아 ) 지역으로 원정을 간다기에 불려갔다가 같이 죽는다. 이 부분을 떠올리면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 바보는 혼자 죽지 않는다.. '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종종 보인다.



아퀴타니아에서 이기다 ( 기원전 56년 )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가 카이사르 없이도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해낸다. 재밌는 건 로마친화적인 갈리아족들에게 원군을 요청해 전투시 평소의 3열횡대가 아닌 2열횡대로 포진했다는 점이다. 로마군 사이에 갈리아 원군을 한명씩 번갈아 배치해 전쟁 중에 도망가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도록 했단다.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라고 불릴만큼 영민해 보인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귀족과 대립하는 인물이면서도 로마 귀족들의 자제들을 많이 데리고 갈리아로 원정을 왔다. 이런 부분을 속쓰려하는 로마 귀족들 중에 졸부 크랏수스와 언변의 달인 키케로 등이 있었다.


모리니족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다 ( 기원전 56년 )

평야나 언덕 등지에서 서로 군대를 포진해 싸우는 대회전 방식에서는 도저히 로마군을 이길 수 없자 게릴라 전이 등장한다. 로마군도 별 수 없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해 꼼꼼한 방식으로 전환한다.

로마군은 전투에서 이기고, 볼모를 잡고, 무기를 회수한 뒤 지속적인 보급품을 요구하는 확실하고 지속적인 점령방식을 사용했다. 볼모들은 포로대접이 아니라 로마 귀족과 비슷한 교육 및 생활상을 익히게 한 후 돌려보내 갈리아지역에서도 로마식으로 살아가는 스타일이 퍼지도록 유도했다. 이는 군복무를 끝낸 로마군들에게 점령지의 땅을 주어 정착하게 하는 것과 함께 로마 제국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WRITTEN BY
리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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