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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섣부른 마음에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제7의 봉인"을 본 뒤 아마도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 적이 있었다. 온갖 찬사들을 그냥 받아들이기도 싫었고, 스스로 되새김질을 해보자니 엄두가 나질 않았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영화를 집요하게 헤짚어보는 일은 별로 하고싶지 않다. ^^;; 


기본적으로 영화는 즐기기 위한 매체이고, 받아들이기 쉬운 혹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명료한 주제와 장면들을 담고 있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문득 예술영화의 거장 중 한 명이라는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를 찾게 된 건 이런 안락한 자세로 인해 최근 영화에 대한 흥미가 예전에 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열광하면서 보던 블록버스터들이나 선정적인 광고카피들이 난무하는 영화들조차 습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영화는 초라해지고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거창하게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슬럼프같다고 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편식하다가 입맛을 잃어버린 꼴이라 텁텁하고 까끌한 음식으로 자극해보려고 과감하게 다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 앞에 앉았다.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긴장해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알 수 있었고, 싸구려 인터넷 용어인 "두뇌 풀가동" 상태로 엔딩까지 지켜봤다. 덕분에 값비싼 특수효과나 화려한 컴퓨터그래픽들이 주지 못했던 화끈한 전두엽(!) 마사지를 받게 됐다. ^^;; 


영화관람 후 오래간만에 시간을 조금 더 들여 정보를 수집했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영화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훌륭한 예술영화들을 만들어서라기보다는 "영화"라는 장르가 예술의 한 종류임이 분명하다는 걸 증명했다는 데 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라는 확인했다. 


잉마르 베리만 이전까지는 "영화"가 예술의 한 형태라고 얘기하면 그건 하나의 "주장"에 가까웠으나, 그의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후, "영화"가 예술의 한 형태라는 게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라고 한다. 요즘 영화팬들에게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의아한 얘기지만(요즘은 고전영화하면 예술영화와 비슷하게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라고 본다.^^;;), 1895년에 영화가 만들어지고 1950년대까지 영화의 위상은 예술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격상은 잉마르 베리만 혼자서 이뤄낸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페르소나"를 보면 아마 공감할 것이다. ^^;; 







영화 "페르소나"에 관해서는 대개 난해하다고들 한다. 미국의 대중적인 영화평론가 로져 에버트는 "페르소나"가 아주 명료한 영화라고 했지만, "페르소나"는 곱씹을수록 더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보고 있고 이에 아주 공감한다. 로져 에버트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단수라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힌트라고 했다.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 1권 참고)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기억나겠지만, 영화 후반부에 두 주인공인 연극배우 보글러 부인(리브 울만)과 간호사 알마(비비 앤더슨)의 얼굴들이 반쪽씩 합쳐저 하나로 되는 장면이 있다. 잉마르 베리만은 두 여배우들의 못생긴 한 쪽 얼굴들을 이중인화해서 하나로 만들어 여배우들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당연히 그들은 서로의 얼굴이 이상하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 참고. 1998년)


이쯤에서 "페르소나"라는 단어에 대해 설명하자면 원래 그리스어로 연극배우들이 쓰는 "가면"이나 "탈"같은 것들을 뜻했는데, 정신분석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이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 관계 속에서 본 모습과는 다른 행동이나 습성을 보이는 것에 대해 "페르소나"를 사용하고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이런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분야에서는 영화감독들이 영화 속에 자신의 분신 역할을 하는 배우들을 자주 등장시킬 때 사용한다. 간혹 "페르소나"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보는 얘기들도 있으나, 약간 왜곡된 것으로 추측된다. 







영화 "페르소나"는 잉마르 베리만의 다른 영화들처럼 그가 기억하는 현실을 영화에 투사시켜 내면적인 치유나 극복을 위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먼저 잉마르 베리만이 직접 쓴 "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시공사, 1998년)에 15쪽 분량(사진 포함)를 참고로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정리해 본다. 


그가 "페르소나"를 만들게 된 이유는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 외에도 왕립극단 단장으로 역임하면서 예술적 창의성이 메말라가는 것을 느끼고, 다시금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무언가 내세우기를 좋아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려 순수했던 시절로 되돌아가 마음껏 자유를 느끼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페르소나"가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창작노트의 "페르소나" 챕터는 "나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작업하면서 오직 영화만이 발견할 수 있는 무언의 비밀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라고 끝맺는다. 


영화 속에 커다란 비극들(예를 들면, 분신사건같은..)은 개인적인 형태의 예술이 사회적인 사건들로 인해 희미해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이 토론에서 그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보글러 부인은 실어증이 아니라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관객들이 잘 파악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는데, 요약하기 어렵게 적혀있어 이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 적어도 단순히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영화 속 주요 사건 혹은 메시지로 추측되는 것들이 시간과 공간이 아닌 마음 속 혹은 정신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길 원했다고 한다. 


알마 간호사가 보글러 부인이 깨진 유리병을 밟도록 놔두는 것은 보글러 부인이 정신과 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감춰진 얘기를 적은 것에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페르소나를 가진 알마 간호사가 스스로 얼마나 쉽게 간호사로써의 역할을 잊어버리고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드러낸 부분을 살펴봤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로저 애버트의 의견처럼 분명한 부분들도 많다. 


영화 시작은 소년이 이불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끌어당기는 모습에서 이미 충분한 어머니의 사랑일지라도 끊임없이 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요구하려는 아기를 연상시킨다. 영화임을 암시하는 몇몇 장면들과 소년이 닿을 수 없는 어머니의 얼굴 사진을 향해 손을 움직이는 것 역시 평소 잉마르 베리만이 얘기했던 영화라는 "필요한 환상"에 대한 표현이다. 관객이 영원한 환상일 수도 있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 그 안에 어머니의 얼굴이 들어있는 건 감독의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암시한다. 그는 가족관계가 아주 좋지 못했다. 이후에 영화는 보글러 부인과 자식에 관한 어두운 갈등, 왜곡된 관계가 드러낼 뿐,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영화 초반과 맞무리는 부분으로 보여진다. 


도입부에서는 이런 분명함과 함께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상당히 파격적으로 들어가 있어 당혹스럽다. 무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겠고, 어린 시절의 우울한 반영일수도 있을 것 같다. 이후에 등장하는 멋진 영화장면들에 비해 너무 돌출되어 관객을 긴장시킨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긴장타라고 윽박지르면서도 기분나쁘지 않게 하는 영화는 아주 드물다. 


간호사 알마가 보글러 부인의 편지를 전하러 가는 도중에 편지를 엿보는 장면에서는 빗방울 소리가 마치 주방의 씽크대에서 물새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보글러 부인에게 친근했던 알마의 마음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듯한 느낌도 들고, 보글러 부인의 사생활이 새어나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연이어 알마가 연못가에 서 있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알마가 서있는 곳은 마치 사진처럼 정지된 느낌이지만, 알마의 모습이 투영된 물의 모습에서는 상당한 흔들림이 동시에 보여진다. 간호사 알마로써의 페르소나는 최대한 변화가 없으려고 하지만, 인간 알마의 본질은 이미 어그러지고 있던 것이다. 이 장면 이후부터 보글러와 알마의 치열한 대립과 혼란, 환상적인 체험이 시작된다. 


간호사 알마로부터 시작되는 혼란은 이미지의 향연이자 끝을 알 수 없는 증폭으로 보여진다. 연극배우로써, 사회의 저명인사로써의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보글러 부인을 만남으로해서 왜 간호사 알마가 그토록 쉽게 실체를 드러내고, 가면과 실체 사이를 방황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몇몇 장면에서는 서로의 페르소나를 원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풍김으로써 영화제목 "페르소나"에 대한 최대한의 혼란을 야기한다. 보글러 부인의 표정은 알마의 것과 대비되면서도 결국 다르지 않은 것임을 나타내는데,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보글러 부인이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은 굉장한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먼저 페르소나를 인지하고 벗어던진 보글러 부인의 얼굴과 뒤이어 보글러 부인과의 접촉을 통해 말끔한 페르소나 뒤편의 실체를 인지하게 되는 알마의 얼굴을 어두운 부분만 합침으로써 만들어낸 괴상한 얼굴은 어두운 실체간의 접촉으로 보여진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 대개 잘생긴 한쪽 면으로 전체 얼굴을 간주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배우들의 얼굴들을 양 쪽으로 나눈 뒤 못생긴 쪽만 합쳐 하나의 얼굴(그렇다! 단수다!)을 만들었고, 이 사진을 보자마자 여배우들은 곧장 서로의 얼굴이 이상하게 보여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Ingmar Bergman's Persona (1966)


이때부터 본격적인 난해함이 시작된다.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보여지는 얼굴은 대개 좋게 보이는 쪽이라는 설정이라면 어두운 얼굴을 합친 것은 분명 실체가 결합된 모습이다. 그리고 괴상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페르소나" 역시 분명 밝은 이미지는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원래 계획에는 간호사 알마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과정에서 남자친구가 연기하듯 자신을 대하는 모습에 소름끼쳐 하는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페르소나는 어두운 실체를 담고 있는 만큼 깨지기 쉬운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더러워지기 쉬운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인가 아니면 실체의 어두운 깊이만큼이나 반대급부로 아름답게 보여지는 것인지에 대한 얘기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알마가 영화 초반 아주 조심성있게 환자를 생각하는 차분한 간호사로 등장해 영화 후반 얼마나 쉽게 반감과 분노에 휩싸이는지 떠올려 봤으면 싶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아주 개인적인 기억들에 깊이 접근함으로써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질들에 대한 성찰이 담긴 영화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페르소나"는 관계 속에서 가지게 되는 본질과 조금 다른 가면들이 실존한다는 걸 보여주면서 그 가면과 실체 사이의 반응을 담아냈다. 나의 실체, 나의 페르소나, 상대방의 실체, 상대방의 페르소나가 모두 인지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 모습을 감당할 수 있을까? 


[YES24] 페르소나(Persona)

WRITTEN BY
리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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