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베리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3년 )

카이사르와 라비에누스의 활약상이 정리되어 있다. 트레베리족을 평정하는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사용한 유인책을 똑같이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단지 연설할 때 내용만 다를 뿐이었다. " 여러분은 우리 사령관인 카이사르에게 그토록 자주 보여주던 것과 같은 용기를 지금 지휘관인 나에게도 보여주시오. " 라고..




두 번째 라인 강 도하 ( 기원전 53년 )

게르마니아는 일부 부족들에게만 로마의 영향이 퍼진 상태라 여전히 갈리족의 내분을 틈타 병력을 보내고 있기에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라인강을 건너려고 한다.

두 번째 도하인지라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여러 풍습과 문화를 기록해 뒀는데, 제법 재밌다.


갈리족의 관습과 제도

싸움을 하는 기사 ( 혹은 전사 ) 계급과 종교를 주재하는 드루이데스 ( 혹은 드루이드 ) 들이 존중받는 계급이며 그밖에는 별반 차이없이 고달팠다고 한다. 미신이 유행했음에도 아폴로, 마르스, 미네르바 등의 신들을 숭배했고, 그 중 메르쿠리우스가 으뜸이었다고 한다.

갈리족은 자신들이 모두 " 디스 " 라는 한 아버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는데, 디스는 저승의 신 플루토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게르마니족의 관습과 제도

싸움 잘하기로 유명한 게르마니족은 우유, 치즈, 육류를 주로 섭취하고, 주변에 넓은 황무지를 갖고 있는 게 자랑이었다고 한다. 성문제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단다.

두 뿔 사이에 또다른 거대한 뿔이 있다는 소와 엘크라고 하는 넘어지면 못 일어나는 동물, 그리고 난폭한 들소를 봤다고 카이사르는 주장하는데, 제일 처음 말한 동물이 아마 유니콘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으나, 비현실적인 얘기라 카이사르가 오해했을 것이라는 게 더 상식적으로 보인다.




에부로네스족의 나라를 초토화하다 ( 기원전 53년 )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말했다. 전쟁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고, 운도 전쟁의 큰 요소 중 하나라고. 오늘날에도 통용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에부로네스족과의 전투는 멋진 지휘보다는 난잡한 세력싸움에 가까웠다. 카이사르는 주변의 우호적인 부족들과 자신의 주력부대를 동원해 가능한한 넓은 지역에서 에부로네스족을 괴롭혔는데, 그 빈틈을 뚫고 다른 외부세력이 로마군의 기지를 급습한다. 로마군 스스로 겁에 질렸다는 표현이 이곳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아마 이때가 신입으로 들어온 병사들이 가장 많은 때로 보인다. 카이사르는 기지로 돌아와 기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만 지적한다. 그밖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신참들이라 주력병력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두 번째 라인강 도하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났다. 신참들의 병사를 좀 잃기는 했어도 나름 전쟁경험을 쌓았고, 정보도 많이 수집했으며, 게르마니족의 영토를 초토화시키며 위세를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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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브리탄니아 원정 ( 기원전 54년 )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제대로 준비하고 영국 ( 브리탄니아 ) 으로 들어가 한바탕 점령전쟁을 벌인다. 영국해협을 건너가기 전에 언제나 그렇듯 갈리아족은 말썽을 일으키는 데 이번에는 유력한 부족장이었던 아이두이족의 둠노릭스였다. 땡깡부리며 도망다니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온 얼마되지 않은 시점부터는 대개 갈리아의 반란에 대비하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부족에 대해서는 인질 겸 정보원 겸해서 부족장들이나 유력인사들을 군대와 함께 데리고 다녔다.

두번째 브리탄니아 원정에서 주된 상대는 캇시벨라우누스였다. 브리탄니아에서도 이번에는 제법 뭉쳐서 저항했지만, 야만족들의 치명적인 약점인 분열은 언제나 발목을 잡았다. 로마군은 또 새로운 형태의 전투경험을 쌓았다.

이번 장에서는 카이사르가 지리학적인 오류를 많이 범했기에 일분 연구자들은 이 부분이 가필(?)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단다.




사비누스의 부대가 에부로네스족에게 대패하다. ( 기원전 54년 )

" 이런 일은 대개 전투가 벌어지고 나서야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

아마 갈리아원정기에서 마지막 대전투 ( 알레시아 공방전 ) 를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입은 어이없는 사건이 아닌가 싶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갈리아 부족장의 속임수에 넘어가 참모진과 주요 백인대장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지를 벗어났다가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자기도 죽게 된다.

여러 모로 ' 역시 바보는 혼자 죽지 않는구나 '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데, 적들이 습격하는 와중에도 지휘관급들은 방어진을 구축하거나 기지로 돌아가는 등의 필요한 행동들을 하는데, 사비누스는 이때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다가 갈리아 부족장에게 협상을 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만나러 갔다가 불쌍한 죽음을 맞이한다. 베테랑 지휘관들은 행군 중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이미 깨우치고 있었으나, 가장 우두머리인 사비누스만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정보는 중요하지만, 적이 자진해서 알려주는 정보의 경우에는 몇 번의 검증을 거친 후에 믿고 활용해야 한다. 게다가 사비누스는 지휘관으로써 정말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바로 어떤 결정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려는 자세였다. 그 바람에 참모진과 백인대장들이 마지못해 따라나섰다가 이 꼴을 당한 것이다.




네르비이족이 키케로의 월동 진지를 공격하다. ( 기원전 54년 )

좋은 군대란 한 부대의 실수가 다른 부대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점도 그 특징 중 하나다. 사비누스보다 열악한 조건에서 갈리아 측은 똑같은 속임수를 퀸투스 키케로 ( 아마 유명한 정치가였던 키케로의 동생이거나 자식이었던 ) 에게도 구사했으나, 그는 로마인다운 방식으로 거절했다. 그 방식이란 무장한 적과는 타협하지 않는다인데, 협상은 적을 무찌른 후에 진행한다는 것과 함께 전쟁터에서는 아주 현실적인 구호가 아닐까 싶다.

이 계략이 실패하자 갈리아측은 로마군의 공병술을 곁눈질해 배운 실력으로 공성탑을 쌓고 포위공격을 감행한다. 키케로의 부대는 최선을 다해 버텨내는데, 이때 재밌는 백인대장 둘이 등장한다. 티투스 풀로와 루키우스 보레누스인데, 서로 용맹을 뽑내고 우의를 다진다. 이들이 재밌는 이유는 HBO 미니시리즈 드라마인 " 로마 ( Rome ) " 의 주인공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로마의 내전기 이후부터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집권하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두 캐릭터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등장했고, 드라마를 이끌어가는데, 제법 웃기기까지 한다. 이 미드는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훨씬 재밌다. ^^;;

우여곡절 끝에 이 소식을 듣게 된 카이사르는 숫적 열세를 속도와 유인술로 극복해 적들을 물리치고 아군을 구해낸다.




갈리아의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르다 ( 기원전 54 ~ 53년 )

퀸투스 키케로는 약한 체력에도 현명한 판단력과 의지로 위기를 극복했지만, 사비누스가 저지른 실수와 갈리아 부족 특유의 자유로운 오해(?)로 인해 대부분의 지역에서 위기가 고조된다. 로마군에서 유일하게 카이사르와 동급의 전투력을 지닌 라비에누스는 지휘관다운 처신을 하는데, 적들의 위협에 차분히 대처하다가 약한 틈을 타 적군의 대장만 집중적으로 노려 죽여버린다. 그러자 대개의 갈리아 부족들이 그러하듯 남은 병사들은 흩어져 버린다.




5권 두번째 반란에서도 로마군의 장기가 돋보이는데, 정보를 공유하는 과정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이 정보를 활용하는 모습이다. 카이사르는 직접 가야할 일과 맡겨도 될 일에 대한 판단이 분명하고, 판단이 섰으면 주저없이 움직였다. 그의 믿음직한 부하들은 언제나 카이사르를 믿고 신뢰했으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대개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다. 5권은 주로 로마군들의 위기들이었지만, 극복해 내는 모습들을 보고 배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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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페테스족과 텡크테리족을 도륙하다 ( 기원전 55년 )

갈리아 지방으로 넘어온 야만스런 게르마니족을 크게 무찌른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갖은 꼼수를 부리던 게르마니족은 카이사르와 로마병사들의 분노를 사 끝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궤멸되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카이사르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는 자신들이 융성했을 때 괴롭히고 약탈했던 갈리족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야만족들 사이의 어리석은 관계를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 라인 강 도하 ( 기원전 55년 )

라인강을 넘어서 게르마니족에게 위세를 떨치려는 카이사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라인강 도하는 서양학자들에게 여러 관심사를 제공했는데, 그 중 어떻게 그런 짧은 시간동안 다리를 만들어 통과할 수 있었나 하는 점이었다. 몇년 전에 재현에 성공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세한 건 읽는이가 확인했으면 한다. ^^;;


첫 번째 브리탄니아 원정 ( 기원전 55년 )

드디어 영국이 역사에 등장한다. 카이사르가 브리탄니아로 건너갔다가 고생한 얘기가 나온다. 배도 부서지고, 식량도 부족했고, 처음보는 야만인들의 전투스타일에도 애를 먹었지만, 무사히 갈리아 지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야만적인 갈리족들 중 일부는 로마병사들이 전리품을 노리고 습격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당연히 따끔하게 보복한다.

로마인 이름 중 정말 특이한 이름 한개를 발견했다. 아마 전통적인 로마인은 아니었을 테고, 다른 부족이었다가 로마인으로 편입된 인물로 보여진다. 아마 이때까지는 로마시민권을 획득하는 게 엄청난 혜택이었을 것이다. 로마시민권자가 로마가도 ( 도로 ) 를 따라 여행을 하다가 습격을 당한 경우, 로마군이 이를 알게 되면 보복을 감행했기에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득이 있었다. 돌아와서 사람이름이 이래도 되나 싶은 로마인의 이름은 " 루키우스 아우룽쿨레이유스 콧타 " 이다. 도대체 어디서 살던 인물일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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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에서의 작전 실패 ( 기원전 57년 )

카이사르가 잠시 이탈리아로 간 사이에 알페스 ( 오늘날의 알프스 ) 의 고갯길에 세르비우스 갈바를 12군단과 함께 파견했는데, 이는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전투를 하지 않던 월동시기였는데, 갈리아 부족이 습격해와 전투를 치룬 후, 여건이 좋지 않자 갈바는 로마화되어 있는 속주로 이동한다. 여기서도 로마의 경험많은 중무장 보병들이 그 역량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갈리아족이 로마에 덤빈 이유가 잘못되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사실상 로마는 상인들의 교류나 속주의 안정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교통요지 혹은 방어를 위한 주요 지역을 점령해 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갈리아인들에 비해 관세를 조금 덜 받거나 야만적인 행위는 조금 덜해지긴 하겠지만,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이런 차이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카이사르는 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월동기간동안 갈리아를 떠나있거나 로마와 연락을 자주 취해야 했다. 당시 로마는 많은 수의 귀족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공화정이었는데,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해 먹고 살기 힘든 민중들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험난하고 피곤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복잡한 국내 정치도 조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군단도 전투를 통해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지시가 없어도 살아움직이듯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서양 연안 전투 ( 기원전 56년 )

오늘날의 영국 땅을 바다 건너로 바라보는 갈리아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를 얘기한다. 지중해의 잔잔한 바다에 적합했던 로마군의 배가 대서양의 험난한 바다에는 맞지 않았으나 로마군의 장점이었던 적응력 덕분에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삼두정치의 한 주역이었던 졸부 크라수스의 아들로 보인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이 청년을 매우 아꼈으며, 푸블리우스 크랏수스 역시 이에 보답할 만큼 뛰어난 인재였다고 한다. 갈리아 원정기에서 사람 이름 앞에 웬만해서는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데, 푸블리우스 크랏수스에게만은 여러 곳에서 " 젊은 " 이라는 단어를 일부로 붙인 게 그 증거라고 한다. 이후에 활약상이 좀 나오는데, 아쉽게도 아버지인 졸부 크랏수스가 파르티아 ( 소아시아 혹은 페르시아 ) 지역으로 원정을 간다기에 불려갔다가 같이 죽는다. 이 부분을 떠올리면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 바보는 혼자 죽지 않는다.. '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종종 보인다.



아퀴타니아에서 이기다 ( 기원전 56년 )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가 카이사르 없이도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해낸다. 재밌는 건 로마친화적인 갈리아족들에게 원군을 요청해 전투시 평소의 3열횡대가 아닌 2열횡대로 포진했다는 점이다. 로마군 사이에 갈리아 원군을 한명씩 번갈아 배치해 전쟁 중에 도망가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도록 했단다.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라고 불릴만큼 영민해 보인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귀족과 대립하는 인물이면서도 로마 귀족들의 자제들을 많이 데리고 갈리아로 원정을 왔다. 이런 부분을 속쓰려하는 로마 귀족들 중에 졸부 크랏수스와 언변의 달인 키케로 등이 있었다.


모리니족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다 ( 기원전 56년 )

평야나 언덕 등지에서 서로 군대를 포진해 싸우는 대회전 방식에서는 도저히 로마군을 이길 수 없자 게릴라 전이 등장한다. 로마군도 별 수 없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해 꼼꼼한 방식으로 전환한다.

로마군은 전투에서 이기고, 볼모를 잡고, 무기를 회수한 뒤 지속적인 보급품을 요구하는 확실하고 지속적인 점령방식을 사용했다. 볼모들은 포로대접이 아니라 로마 귀족과 비슷한 교육 및 생활상을 익히게 한 후 돌려보내 갈리아지역에서도 로마식으로 살아가는 스타일이 퍼지도록 유도했다. 이는 군복무를 끝낸 로마군들에게 점령지의 땅을 주어 정착하게 하는 것과 함께 로마 제국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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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에는 " I.CAESAR COMMENTARII DE BELLO GALLICO " 로 써있고, 안쪽 첫 페이지에는 " COMMENTARII DE BELLO GALLICO " 로 써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원래 책제목이고 전자는 제목 앞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자신의 이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Iulius Caesar. 카이사르는 코끼리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을 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지은이의 설명에 따르면 ' commentarius ' 라는 건 좀 특이한 이름이라고 하는데, 지은이가 추측하기로는 공식적인 보고서와 역사서 집필을 위한 초고의 중간형태로 자신의 기술이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읽는이는 저 단어의 뜻도 모르고, 로마시대의 공식적인 보고서는 어떤 형태의 단어가 쓰이는지 모르고, 자유로운 역사서 집필인 경우에 쓰이는 단어도 모르니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한다. ^^;; 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 에 이 책에 관한 설명이 나오긴 하는데, 지금으로썬 딱히 떠오르는 부분이 없다.

" 갈리아 원정기 " 는 천병희님의 책 외에 범우사에서 나온 " 갈리아 전기 " ( 박광순 옮김 ) 라는 번역본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 를 읽은 직후여서 화려한 시오노 나나미의 글솜씨에 비해 너무 담백한 문체라 지루한 느낌이 있었으나, 이제 지리, 문화, 전투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천병희님의 번역본은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읽혀지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 삼국지 ", " 초한지 ", " 수호지 " 등의 동양 고전들을 주로 읽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서양고전에 더 재미를 느끼고 있다. 막연한 호기로움에서 현실적인 역동성을 즐기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철딱서니 없는 정신상태는 여전하다. 이기는 편! 우리 편!! ㅋㅋㅋ

갈리아원정기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숲,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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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아 원정기 " 는 로마가 낳은 유일한 천재라고도 불리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당시의 갈리아 지역 ( 오늘날의 프랑스 일부, 스페인, 포르투칼 등등의 지역 ) 과 브리타니아 ( 영국 ), 게르마니아 ( 독일 )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한 기록이다. 전 8 권 중 7권까지는 카이사르 본인이 썼으면 8권은 카이사르의 막료 (? 해방노예? ) 인 히르티우스가 작성했다고 한다.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전직 집정관 ( 로마 공화정의 최고관리 ) 자격으로 갈리아 지역에 총독이 됨으로써 갈리아 원정이 시작됐으며, 9년동안 갈리아 지역을 완전정복하는데, 읽다보면 " 삼국지 " 에서 제갈량이 맹획을 7번 잡았다 7번 놓아주는 사건에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적을 때는 2만여명, 많을 때는 4만여명의 중무장 보병들과 대개 몇 천 단위였던 기병 ( 기사계급 ) 들을 데리고, 끊임없는 전쟁을 치뤄내 갈리아 지역과 게르마니아에 로마식 평화를 정착한다.

카이사르는 정치가로써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장으로써도 이전의 명장들에 못지 않은 전략가였다. 카이사르 이전에 알려진 유능한 무장으로는 병참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피로스,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까지 진출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로마의 악몽이었던 한니발과 그를 무찌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존경받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우고 따라할 만한 전형적인 전술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피로스를 보고 그 후대의 무장들은 전쟁터에서 병참기지를 세우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로스를 기억하면서는 기동력과 병력의 배치를 넓게 가져가면서 전투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줄 알게 됐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들보다 비슷한 시대이면서도 가장 늦게 등장한 인물인터라 앞사람들이 보여준 전술과 참고사례를 활용해 로마에 많은 승리를 안겨줬다.

이렇듯 로마의 희대의 명장이자 희대의 정치가였던 카이사르는 로마나 이탈리아의 입장에서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지만,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는 그 시선이 다르다. 그렇지만, " 갈리아 원정기 " 를 통해 보자면 적어도 배울 점이 많은 인물인 건 분명하다. 자신의 전쟁기록이자 갈리아 지역에 대한 관찰기지만 실수도 분명히 드러내고, 상황을 굉장히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던 점이나 불필요하게 과장하지 않았던 점등은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에 비해 훨씬 고결해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로는 바람둥이였지만서도.. ^^;;

독일의 황제를 일컫던 카이저 ( Kaiser ) 나 러시아 황제를 가리키는 차르 ( tsar ) 의 호칭은 카이사르에게서 기원한다고 한다. ( 영화 " 유주얼 서스펙트 " 에 등장하는 악당의 이름이 " 카이저 소제 " 이기도 했다. ^^;; ) 이렇듯 강력한 군주나 힘을 가진 호칭을 카이사르에게서 유래하게 된데는 바로 갈리아 원정기에서 보여준 카이사르의 전쟁수행 능력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다시 말하지만, 카이사르는 되도록이면 사실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기록하려 했기에 전쟁상황은 삼국지같지만, 그 자세한 내막은 삼국지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전쟁터에서 보여준 리더십이나 위기극복, 전략적 사고가 음미해 보면 아주 재밌다. 물론 머리에 뿔이 하나 달린 말같은 짐승을 봤다는 황당한 얘기도 있지만.. ^^;; ( 이걸 후대 사람들이 유니콘을 묘사한 게 아닐까 하고 떠들어 대기도 했다. ^^;; )

덧붙이기 : HBO 에서 방영했던 " 로마 " 라는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있다. 그 드라마에서도 " 카이사르 " 가 등장하는데, 갈리아 전쟁을 끝내고, 로마의 내전도 다 마무리한 상황에서 시작된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아우구스투스가 전제군주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진행되는데, 이 드라마를 이끄는 두 주인공의 이름이 바로 " 갈리아 원정기 " 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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