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다. 

동생 가게에 일손을 도우러 가는 길에 보니 근처의 책대여점에서 창문에 " 폐업정리 " 라는 종이가 나붙어 있었다. 가끔 이런 경우를 보고 들어가 보면 찾던 책들은 이미 나가버리고 없어 별 생각없이 지나쳤다.

동생에게 언제부터 그 가게가 폐업을 시작했는지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됐다고 했고, 아마 좋은 책들을 전문적으로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넘어갔을 거라고 했다. 역시나..

그런데 오늘따라 동생이 몸이 좋지 않아 일찍 문을 닫는다고 하길래 가는 길에 혹시나 있을지 모를 내 취향의 만화를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 구매할 생각은 없었고, 폐업하는 만화대여점에서 시세는 얼마나 하고, 어떤 조건인지 등등에 물어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간의 경험을 통해 내 취향의 만화를 내가 생각하는 가격에 구입할 수 있을 확률은 로또확률 정도라고 생각했다.

별 생각없이 들어서서 입구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1000 원에서 2000 원 사이란다.
흠.. 가격은 괜찮군 하는 생각과 함께 책장을 둘러보는 순간, 빈 칸이 거의 없었다. 와우~
사람도 지금 나가는 사람과 책 정리하는 사람, 그리고 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나 혼자였다. 우와~~

갑자기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루의 피곤을 이 쇼핑에서 풀어주마!!

크지 않은 가게인데다 반은 소설과 DVD 등이 자리잡고 있어 책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빈 칸이 거의 없어 내가 찾던 책들이 있었다!!
반드시 한 세트는 챙겨가겠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한세트면 돼.. 한세트..
이왕 한 세트 구매하려 마음을 굳혔으니 책에 찢어진 부분, 없어진 쪽, 혹은 껌딱지 등등의 훼손이 발생했는지 철저히 살펴봐주마 하며 둘러봤다. 심지어 몇몇 권은 쪽번호도 확인해 보고 있었다. --;;

그런데, 불과 얼마 후 어디선가 도란도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갑자기 어디선가 젊은 남정네들과 처자들이 한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처자들이야 취향이 다르니 신경쓰이지 않지만 젊은 남정네들은 다르다!! 이런 된장맞을..
한 남정네가 만원의 예약선금(?)을 걸고, 잔금과 함께 찾으러 오겠다면 만화책 한 질을 찜해버리고 갔고, 뒤이어 한 녀석이 더 똑같은 짓을 했다.
갑자기 심장이 급격히 뛰기 시작하고 머리가 하얘지면서 본능적으로 흝었던 곳을 다시 처음부터 재빨리 흝기 시작했다. --;;
머리 속에 비용이 떠오를 없었다. 챙겨야한다!!
반드시 갖고 싶었던 것만은 반드시 사수하자!!
어디선가 마음과 정신의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진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사고패턴을 정상으로 돌리기에는 미미했다.

제길슨.. 어느 새 카운터 앞에 세 셋트, 44권의 만화책을 쌓아놓은 내 자신을 발견했다. T T

전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였다.

갖고 싶던 책이 몇 질 더 있었지만, 다행이 이때 합산가격을 물어볼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몬스터 18 권. 각 1500원.
플루토 8 권. 각 1500원.
마스터 키튼 18 권. 각 1500원.
합계 6만6천원.

샀을 때의 기쁨은 값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사고 나서의 충격도 마찬가지입니다. --;;
밥은 먹고 다닐 수 있을까?

평소에 이런 돈이 있을리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조카를 위한 어린이날을 위해 은행에 들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나마 어버이날을 위해 찾아뒀던 돈이 남아있는 걸 행운이라 여기며 만화대여점을 나섰다.

무거운 짐을 한번에 옮겨오지 못해 동생가게의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고, 가방에 넣을 수 있는 일부만 들고 왔다.

카운터에서 구입가를 들었을 때 정신이 번쩍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오면서 무모한 질문을 했다. 언제까지 폐업정리를 하느냐고.. --;;
마지막 날 다시 한번 그곳을 방문할 내 모습이 그려진다. --;; 권당 500 원에 구입해 주마..

만화책을 어린 시절부터 봐왔지만, 요즘 아이들이 사용하는 은어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일본쪽 만화들을 자주 보긴 하는데, 점점 더 알 수 없는 용어들로 인해 어리둥절해 하는 편인데, 오늘의 내 모습이 딱 " 게슈탈트 붕괴 " 라는 말의 문맥과 비슷한 것 같다. 사실 " 게슈탈트 붕괴 " 라는 말을 어떤 분위기에서 쓰는지 잘 모르지만서도..

추신 1

조카야 미안하다.
이번 어린이날에는 팔랑개비 하나로 동심을 즐겨보자꾸나.
어차피 너 글 못 읽잖아.
니가 이 만화책을 읽고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꼭 물려주마. ^^;;

나 어릴 적에 이런 만화책이 있었단다.
50 원을 내면 한번 볼 수 있었는데, 딱딱한 나무의자에 반쯤은 선듯한 자세로 천천히 넘기다가 아줌마가 안 볼때면 파라락 다시 앞으로 넘겨 침이 마르도록 봤단다. ( 걸려서 욕을 한 바가지 먹을 때도 있었단다. T T )
20 년도 넘게 지나 이런 만화책을 다시 보게 될 때의 감개무량함을 너도 느낄 날이 오길 바란다.
커서도 너의 아빠한테 이르면 안된다. 우리는 그날로 생이별이란다.

만화책표지_2011.05.02_01

이 책 진짜로 봤던 거 같애.. *.*


추신 2 

안전한 집으로 모든 서적들이 반입되면 인증샷을 날릴 예정입니다. ㅎㅎㅎ
(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즐거운 건지, 황당한 건지.. )


WRITTEN BY
리컨
영화를 즐기는 취미를 기록한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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