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원정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베르킹게트릭스와 맞붙은 알레시아 공방전이다. 8만여명의 다수임에도 구석에 몰려 있던 베르킹게토릭스는 전 갈리아지역에 기병대를 보내 약 24만명의 대군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군의 후방에서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로마군은 후방에 병력이 집결되는 동안 베르킹게토릭스를 압박하면서 높은 방어시설들을 구축해 길게 늘어뜨려놨다. 비교적 고지대에 보루까지 갖추긴 했으나, 숫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열세인데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됐으나, 끝내 버텨냄으로써 오랜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략가 혹은 무장으로써의 능력이 출중함에도 명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모습들 때문이기도 한데, 다른 천재적인 전략가들이라면 평야로 유인해 회전을 벌여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주거나 조직적인 모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적에게 안겨줄테지만,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부하들의 전투력에 의존하는 듯한 모습이 종종 보였다. 이는 기존의 명장들과 달리 정치적인 요소 혹은 계략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고, 적들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거나 갈리아 특유의 자유분방함으로 인해 어수선하게 전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자신의 승리를 너무 드러내지 않지만, 실수도 굳이 감추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7권은 이 알레시아 공방전이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로 진행됐으며,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보여준다.




서막 ( 기원전 52년 )

카이사르가 로마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인해 부산한 틈을 타 갈리족은 슬금슬금 반란을 준비한다. 그 와중에 베르킹게토릭스가 갈리족의 리더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해마다 당하고도 또 일어나는 갈리족의 자유정신(?)은 인정해 줄 만 하다. ^^;;




아바리쿰의 포위와 함락 ( 기원전 52년 )

베르킹게토릭스는 로마와 정면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자고 했는데, 말 안듣던 갈리족으로 인해 아바리쿰에 갇혀 게기다가 도망친다. 이 일로 베르킹게토릭스는 리더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게르고비아에서 로마군이 패하다 ( 기원전 52년 )

카이사르는 지휘관으로써 전세를 냉철하게 판단한 뒤, 겁만 주고 후퇴할 것을 지시했으나, 도망가는 적들을 보고 로마군이 미친듯이 싸우는 바람에 도리어 패퇴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부하들을 더욱더 장악할 수 있게 됐다.




베르킹게토릭스가 야전(野戰)에서 패하다 ( 기원전 52년 )

한번 로마군을 물리쳤어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던 갈리족이 카이사르의 부관인 라비에누스와 붙었다가 깨진다. 다시 말하지만, 전쟁터에서는 카이사르 못지 않았던 부장이자 동년배인 라비에누스다. 갈리아 전쟁에서 유일하게 카이사르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쉬운 건 나중에 벌어진 로마의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떠나 폼페이우스의 편에 가담한다는 점이다. ㅡㅡ;;



알레시아의 포위와 함락 ( 기원전 52년 )

상식적으로는 정말 무식한 작전이 아닌가 싶지만, 어쨌거나 갈리족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항복한다. 나름 지형적으로 높고 튼튼한 방어진을 구축했다고는 하지만, 숫적으로는 엄청난 열세인데다 앞뒤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되는 형세였다. 게다가 갈리족이 무작정 공격한 것이 아니라 방어진 중 가장 약한 쪽에 집중하기 위해 전담팀을 따로 짠 후에 그곳을 돕지 못하도록 전체적인 공격을 진행했음에도 무너뜨리지 못했다. 전술적으로는 뛰어나지 못했을지 몰라도 로마군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장악하는 능력에서 카이사르를 따라올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이후에 로마에서는 20일동안 감사제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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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베리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3년 )

카이사르와 라비에누스의 활약상이 정리되어 있다. 트레베리족을 평정하는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사용한 유인책을 똑같이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단지 연설할 때 내용만 다를 뿐이었다. " 여러분은 우리 사령관인 카이사르에게 그토록 자주 보여주던 것과 같은 용기를 지금 지휘관인 나에게도 보여주시오. " 라고..




두 번째 라인 강 도하 ( 기원전 53년 )

게르마니아는 일부 부족들에게만 로마의 영향이 퍼진 상태라 여전히 갈리족의 내분을 틈타 병력을 보내고 있기에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라인강을 건너려고 한다.

두 번째 도하인지라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여러 풍습과 문화를 기록해 뒀는데, 제법 재밌다.


갈리족의 관습과 제도

싸움을 하는 기사 ( 혹은 전사 ) 계급과 종교를 주재하는 드루이데스 ( 혹은 드루이드 ) 들이 존중받는 계급이며 그밖에는 별반 차이없이 고달팠다고 한다. 미신이 유행했음에도 아폴로, 마르스, 미네르바 등의 신들을 숭배했고, 그 중 메르쿠리우스가 으뜸이었다고 한다.

갈리족은 자신들이 모두 " 디스 " 라는 한 아버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는데, 디스는 저승의 신 플루토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게르마니족의 관습과 제도

싸움 잘하기로 유명한 게르마니족은 우유, 치즈, 육류를 주로 섭취하고, 주변에 넓은 황무지를 갖고 있는 게 자랑이었다고 한다. 성문제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단다.

두 뿔 사이에 또다른 거대한 뿔이 있다는 소와 엘크라고 하는 넘어지면 못 일어나는 동물, 그리고 난폭한 들소를 봤다고 카이사르는 주장하는데, 제일 처음 말한 동물이 아마 유니콘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으나, 비현실적인 얘기라 카이사르가 오해했을 것이라는 게 더 상식적으로 보인다.




에부로네스족의 나라를 초토화하다 ( 기원전 53년 )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말했다. 전쟁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고, 운도 전쟁의 큰 요소 중 하나라고. 오늘날에도 통용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에부로네스족과의 전투는 멋진 지휘보다는 난잡한 세력싸움에 가까웠다. 카이사르는 주변의 우호적인 부족들과 자신의 주력부대를 동원해 가능한한 넓은 지역에서 에부로네스족을 괴롭혔는데, 그 빈틈을 뚫고 다른 외부세력이 로마군의 기지를 급습한다. 로마군 스스로 겁에 질렸다는 표현이 이곳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아마 이때가 신입으로 들어온 병사들이 가장 많은 때로 보인다. 카이사르는 기지로 돌아와 기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만 지적한다. 그밖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신참들이라 주력병력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두 번째 라인강 도하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났다. 신참들의 병사를 좀 잃기는 했어도 나름 전쟁경험을 쌓았고, 정보도 많이 수집했으며, 게르마니족의 영토를 초토화시키며 위세를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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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브리탄니아 원정 ( 기원전 54년 )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제대로 준비하고 영국 ( 브리탄니아 ) 으로 들어가 한바탕 점령전쟁을 벌인다. 영국해협을 건너가기 전에 언제나 그렇듯 갈리아족은 말썽을 일으키는 데 이번에는 유력한 부족장이었던 아이두이족의 둠노릭스였다. 땡깡부리며 도망다니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온 얼마되지 않은 시점부터는 대개 갈리아의 반란에 대비하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부족에 대해서는 인질 겸 정보원 겸해서 부족장들이나 유력인사들을 군대와 함께 데리고 다녔다.

두번째 브리탄니아 원정에서 주된 상대는 캇시벨라우누스였다. 브리탄니아에서도 이번에는 제법 뭉쳐서 저항했지만, 야만족들의 치명적인 약점인 분열은 언제나 발목을 잡았다. 로마군은 또 새로운 형태의 전투경험을 쌓았다.

이번 장에서는 카이사르가 지리학적인 오류를 많이 범했기에 일분 연구자들은 이 부분이 가필(?)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단다.




사비누스의 부대가 에부로네스족에게 대패하다. ( 기원전 54년 )

" 이런 일은 대개 전투가 벌어지고 나서야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

아마 갈리아원정기에서 마지막 대전투 ( 알레시아 공방전 ) 를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입은 어이없는 사건이 아닌가 싶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갈리아 부족장의 속임수에 넘어가 참모진과 주요 백인대장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지를 벗어났다가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자기도 죽게 된다.

여러 모로 ' 역시 바보는 혼자 죽지 않는구나 '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데, 적들이 습격하는 와중에도 지휘관급들은 방어진을 구축하거나 기지로 돌아가는 등의 필요한 행동들을 하는데, 사비누스는 이때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다가 갈리아 부족장에게 협상을 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만나러 갔다가 불쌍한 죽음을 맞이한다. 베테랑 지휘관들은 행군 중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이미 깨우치고 있었으나, 가장 우두머리인 사비누스만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정보는 중요하지만, 적이 자진해서 알려주는 정보의 경우에는 몇 번의 검증을 거친 후에 믿고 활용해야 한다. 게다가 사비누스는 지휘관으로써 정말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바로 어떤 결정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려는 자세였다. 그 바람에 참모진과 백인대장들이 마지못해 따라나섰다가 이 꼴을 당한 것이다.




네르비이족이 키케로의 월동 진지를 공격하다. ( 기원전 54년 )

좋은 군대란 한 부대의 실수가 다른 부대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점도 그 특징 중 하나다. 사비누스보다 열악한 조건에서 갈리아 측은 똑같은 속임수를 퀸투스 키케로 ( 아마 유명한 정치가였던 키케로의 동생이거나 자식이었던 ) 에게도 구사했으나, 그는 로마인다운 방식으로 거절했다. 그 방식이란 무장한 적과는 타협하지 않는다인데, 협상은 적을 무찌른 후에 진행한다는 것과 함께 전쟁터에서는 아주 현실적인 구호가 아닐까 싶다.

이 계략이 실패하자 갈리아측은 로마군의 공병술을 곁눈질해 배운 실력으로 공성탑을 쌓고 포위공격을 감행한다. 키케로의 부대는 최선을 다해 버텨내는데, 이때 재밌는 백인대장 둘이 등장한다. 티투스 풀로와 루키우스 보레누스인데, 서로 용맹을 뽑내고 우의를 다진다. 이들이 재밌는 이유는 HBO 미니시리즈 드라마인 " 로마 ( Rome ) " 의 주인공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로마의 내전기 이후부터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집권하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두 캐릭터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등장했고, 드라마를 이끌어가는데, 제법 웃기기까지 한다. 이 미드는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훨씬 재밌다. ^^;;

우여곡절 끝에 이 소식을 듣게 된 카이사르는 숫적 열세를 속도와 유인술로 극복해 적들을 물리치고 아군을 구해낸다.




갈리아의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르다 ( 기원전 54 ~ 53년 )

퀸투스 키케로는 약한 체력에도 현명한 판단력과 의지로 위기를 극복했지만, 사비누스가 저지른 실수와 갈리아 부족 특유의 자유로운 오해(?)로 인해 대부분의 지역에서 위기가 고조된다. 로마군에서 유일하게 카이사르와 동급의 전투력을 지닌 라비에누스는 지휘관다운 처신을 하는데, 적들의 위협에 차분히 대처하다가 약한 틈을 타 적군의 대장만 집중적으로 노려 죽여버린다. 그러자 대개의 갈리아 부족들이 그러하듯 남은 병사들은 흩어져 버린다.




5권 두번째 반란에서도 로마군의 장기가 돋보이는데, 정보를 공유하는 과정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이 정보를 활용하는 모습이다. 카이사르는 직접 가야할 일과 맡겨도 될 일에 대한 판단이 분명하고, 판단이 섰으면 주저없이 움직였다. 그의 믿음직한 부하들은 언제나 카이사르를 믿고 신뢰했으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대개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다. 5권은 주로 로마군들의 위기들이었지만, 극복해 내는 모습들을 보고 배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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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에서의 작전 실패 ( 기원전 57년 )

카이사르가 잠시 이탈리아로 간 사이에 알페스 ( 오늘날의 알프스 ) 의 고갯길에 세르비우스 갈바를 12군단과 함께 파견했는데, 이는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전투를 하지 않던 월동시기였는데, 갈리아 부족이 습격해와 전투를 치룬 후, 여건이 좋지 않자 갈바는 로마화되어 있는 속주로 이동한다. 여기서도 로마의 경험많은 중무장 보병들이 그 역량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갈리아족이 로마에 덤빈 이유가 잘못되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사실상 로마는 상인들의 교류나 속주의 안정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교통요지 혹은 방어를 위한 주요 지역을 점령해 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갈리아인들에 비해 관세를 조금 덜 받거나 야만적인 행위는 조금 덜해지긴 하겠지만,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이런 차이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카이사르는 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월동기간동안 갈리아를 떠나있거나 로마와 연락을 자주 취해야 했다. 당시 로마는 많은 수의 귀족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공화정이었는데,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해 먹고 살기 힘든 민중들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험난하고 피곤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복잡한 국내 정치도 조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군단도 전투를 통해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지시가 없어도 살아움직이듯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서양 연안 전투 ( 기원전 56년 )

오늘날의 영국 땅을 바다 건너로 바라보는 갈리아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를 얘기한다. 지중해의 잔잔한 바다에 적합했던 로마군의 배가 대서양의 험난한 바다에는 맞지 않았으나 로마군의 장점이었던 적응력 덕분에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삼두정치의 한 주역이었던 졸부 크라수스의 아들로 보인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이 청년을 매우 아꼈으며, 푸블리우스 크랏수스 역시 이에 보답할 만큼 뛰어난 인재였다고 한다. 갈리아 원정기에서 사람 이름 앞에 웬만해서는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데, 푸블리우스 크랏수스에게만은 여러 곳에서 " 젊은 " 이라는 단어를 일부로 붙인 게 그 증거라고 한다. 이후에 활약상이 좀 나오는데, 아쉽게도 아버지인 졸부 크랏수스가 파르티아 ( 소아시아 혹은 페르시아 ) 지역으로 원정을 간다기에 불려갔다가 같이 죽는다. 이 부분을 떠올리면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 바보는 혼자 죽지 않는다.. '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종종 보인다.



아퀴타니아에서 이기다 ( 기원전 56년 )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가 카이사르 없이도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해낸다. 재밌는 건 로마친화적인 갈리아족들에게 원군을 요청해 전투시 평소의 3열횡대가 아닌 2열횡대로 포진했다는 점이다. 로마군 사이에 갈리아 원군을 한명씩 번갈아 배치해 전쟁 중에 도망가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도록 했단다.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라고 불릴만큼 영민해 보인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귀족과 대립하는 인물이면서도 로마 귀족들의 자제들을 많이 데리고 갈리아로 원정을 왔다. 이런 부분을 속쓰려하는 로마 귀족들 중에 졸부 크랏수스와 언변의 달인 키케로 등이 있었다.


모리니족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다 ( 기원전 56년 )

평야나 언덕 등지에서 서로 군대를 포진해 싸우는 대회전 방식에서는 도저히 로마군을 이길 수 없자 게릴라 전이 등장한다. 로마군도 별 수 없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해 꼼꼼한 방식으로 전환한다.

로마군은 전투에서 이기고, 볼모를 잡고, 무기를 회수한 뒤 지속적인 보급품을 요구하는 확실하고 지속적인 점령방식을 사용했다. 볼모들은 포로대접이 아니라 로마 귀족과 비슷한 교육 및 생활상을 익히게 한 후 돌려보내 갈리아지역에서도 로마식으로 살아가는 스타일이 퍼지도록 유도했다. 이는 군복무를 끝낸 로마군들에게 점령지의 땅을 주어 정착하게 하는 것과 함께 로마 제국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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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아 원정기 " 1권은 2 개의 부제가 있다. " 헬베티이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8년 ) " 과 " 아리오비스투스를 갈리아에서 쫓아내다 ( 기원전 58년 ) " 이 그것이다. 카이사르가 쓴 " 갈리아 원정기 " 의 첫부분을 따라해 봤다. ^^;;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책의 도입부와 같이  간결하고 효율적인데다 상대방이 예측하지 못하는 단도직입적인 자세가 일품이다. 그렇지만 기원전 58년 안팎의 로마와 갈리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면 이런 직선적인 서술을 읽어가기에 난감한 부분들이 있기에 간략하게나마 참고가 될만한 얘기들을 먼저 적어둔다.

이 당시 로마군은 1개 군단의 정원이 6천명이지만, 카이사르의 군단들만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3천 5백명 안팎이었다. 천병희님의 설명에는 마치 대개의 로마군단이 6천명 이하인 것처럼 씌여졌는데, 다른 총독이나 장군들은 결원을 보충해 대개 6천명 가까이 되는 정원을 채워놓곤 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긴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군단별 혹은 그 밑의 대대별 ( 코호르스 ) 로 부대의 순수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엄한 놈이나 실력없는 놈, 분위기에 맞지 않는 놈이 들어와서 부대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원이 생겨도 내버려뒀다고 한다.

부대원들 역시 그런 카이사르의 방식을 존중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사람이 부족해도 남은 군인들이 충분히 다른 부대와 똑같은 몫을 해줄 수 있다는 카이사르의 신뢰에 긍지를 느끼기도 했고, 혹독한 경험과 서로 간에 다져온 우애(?)가 다른 이들때문에 깨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는데, 막연한 기억으로만 쓰는 내용이니 참고했으면 한다. ^^;;

게다가 원래 로마는 군대가 국민들의 의무였으나, 카이사르 바로 앞 세대인 마리우스 때에 직업군인으로 바뀌었다. 즉, 군대를 모으고 유지하는데 돈이 들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가기 전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어서 채권자들에게 당시 최고 부자였던 크라우스가 보증을 서준 덕분에 무사히 임지로 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군단들은 주력이 중무장 보병이고, 경무장 보병, 기병대 ( 기사계급. 재산이 좀 있어 말을 구입해서 병사와 함께 제공 ) 가 대부분이었다. 공성기기를 만들거나 다리를 놓는 부대가 따로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중무장 보병들이 수행했고, 로마가 정복한 지역에서 차출된 기타 병력들도 있었다.

이때까지 로마의 기병대는 로마출신이 아닌 갈리아나 기타 지역에서 차출된 병력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로마는 말을 기르는 지역도 별로 없었고, 말을 탈만큼 재산이 많은 가문들도 많지 않아 자체적으로 기병대를 생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기사들이 말을 타기 위해 쓰는 안장은 훨씬 뒤에 발명되었기에 이때 기병들은 담요같은 것을 말위에 올려두고 양 발로 몸을 지탱해야 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로마인 출신치고는 드물게 양 팔을 놓고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었는데, 이 덕분에 신출귀몰하게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병대들과 함께 움직일 때는 주의했는데, 로마의 전통적인 중무장보병들에 비해 신뢰가 부족한 갈리아나 기타 지역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는 카이사르의 군인들로 부족함이 없어졌다.

카이사르는 이렇듯 사람을 다루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는데, 그때문에 카이사르에 적대적인 귀족아버지를 둔 자재들이 대거 카이사르 밑으로 들어와 성장했고, 이후의 로마 역사에 많은 흔적을 남긴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대개 평민들임에도 엄청난 긍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행동한다.

생각밖으로 말이 길어져서 다른 부분들은 틈틈이 끼워넣는 것이 낳다고 판단해 이만 줄인다. ^^;;




헬베티이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8년 )

갈리아 지역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부족들이 살고 있는데, 카이사르는 이들에 대해 차분히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는 로마에 비해 엄청나게 야만적인 성향인지라 다루는 게 쉽지 않았다. 약속도 쉽게 어기고 ( 로마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 속이기도 일쑤였다. 그러니 카이사르도 완전 제패 - 이를 속주화라고 하는데, 로마의 문화가 많이 유입되어 어느 정도 안정된 지역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 하는데 거의 9 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이 당시 신체조건은 게르마니아 쪽 사람들이 가장 건장했고, 갈리아 쪽 사람들은 로마 병사들 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이들은 로마 쪽에 비해 고기 등을 주로 섭취했고, 로마 병사들은 빵 등을 먹었다. 그럼에도 로마 병사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전략, 훈련, 장비들에 있었다.

로마 쪽은 뚜렷한 지휘자와 귀족 자제들이나 경험자들로 이뤄진 참모들, 장교들이 있었다.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이들의 경우, 폭발적인 힘을 낼 수는 있었지만 지구력이 떨어졌던 데 반해 밀을 주식으로 하는 로마병사들은 작고 단단한 체구에 지구력이 있었기에 전투가 길어질수록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로마 쪽은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장비면에서도 로마 쪽이 현명했는데, 두껍고 단단한 방패, 크고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는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 비해 로마의 중무장 보병들은 얇고 긴 창, 짧은 양날검, 가벼운 방패와 갑옷을 착용했다. 창은 끝이 휘어져 있어 나무로 된 방패에 박히면 잘 뽑히지 않았다. 그러기에 전투가 시작되면 적의 방패에 꽂혀 적들이 방패없이 싸우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방패로 계속 막다가 적들이 지치면 찌르기도 좋고 베기도 좋은 짧고 날카로운 양날검으로 적의 숨통을 노리는 게 기본적인 전투패턴이었다. 이런 익숙한 전술이 있기에 로마병사들은 마구잡이로 덤비는 야만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헬베티족이 문제가 된 건 게르마니아족 ( 게르만족 ) 의 위협에 못 이겨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이미 로마화 ( 혹은 속주화 ) 가 잘 진행된 지역을 지나가겠다고 했지만, 그곳의 지역주민이나 로마인들이나 이 야만족들이 조용히 지나갈 것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만가지 잡다한 상황들을 겪은 끝에 여러 부족으로 이뤄진 헬베티족을 무찌르는데, 실제 고대의 전쟁상황이 어땠는지 많이 엿볼 수 있다. 군량 주기로 한 부족이 갈팡질팡하고, 서로 내통하는 야만인들도 많고, 부녀자들이 전쟁터 근처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이때 사상자 수는 삼국지 등에 나오는 수치에 비해 믿을 만 한데, 부족단위로 이동하면서 기록을 해뒀기 때문이다. 이 수치들을 보면 갈리아 원정기간 동안 백만명 가까운 병사들을 죽였다는 게 부풀려진 숫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리오비스투스를 갈리아에서 쫓아내다. ( 기원전 58년 )

게르마니족의 왕 아리오비스투스와 맞붙은 기록이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리더로써 유능한 몇 가지 모습을 보게 되는데, 하나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병사들을 설득하는 것과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이다. 자세한 설명은 책을 읽으면서 이해할 부분이지만, 병사들에게 본분을 상기시키고 스스로 솔선수범하겠다며 압박하는 모습이 재밌다. 전투에서 승리한 것보다 볼모로 잡혀있던 병사를 살아서 만날 수 있는 것을 더 기뻐했다는 걸 기록에 남길 정도로 드러냄으로써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건 정말 진심인지 아니면 처세의 절정인지 모르겠다. ^^;;

갈리아 부임 첫 해에 카이사르는 두 번의 대규모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이 당시에는 대개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특별한 날에 전투를 하지 않기도 하고, 야간 전투도 드물었던 시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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