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베티이족'에 해당하는 글 1건






" 갈리아 원정기 " 1권은 2 개의 부제가 있다. " 헬베티이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8년 ) " 과 " 아리오비스투스를 갈리아에서 쫓아내다 ( 기원전 58년 ) " 이 그것이다. 카이사르가 쓴 " 갈리아 원정기 " 의 첫부분을 따라해 봤다. ^^;;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책의 도입부와 같이  간결하고 효율적인데다 상대방이 예측하지 못하는 단도직입적인 자세가 일품이다. 그렇지만 기원전 58년 안팎의 로마와 갈리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면 이런 직선적인 서술을 읽어가기에 난감한 부분들이 있기에 간략하게나마 참고가 될만한 얘기들을 먼저 적어둔다.

이 당시 로마군은 1개 군단의 정원이 6천명이지만, 카이사르의 군단들만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3천 5백명 안팎이었다. 천병희님의 설명에는 마치 대개의 로마군단이 6천명 이하인 것처럼 씌여졌는데, 다른 총독이나 장군들은 결원을 보충해 대개 6천명 가까이 되는 정원을 채워놓곤 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긴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군단별 혹은 그 밑의 대대별 ( 코호르스 ) 로 부대의 순수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엄한 놈이나 실력없는 놈, 분위기에 맞지 않는 놈이 들어와서 부대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원이 생겨도 내버려뒀다고 한다.

부대원들 역시 그런 카이사르의 방식을 존중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사람이 부족해도 남은 군인들이 충분히 다른 부대와 똑같은 몫을 해줄 수 있다는 카이사르의 신뢰에 긍지를 느끼기도 했고, 혹독한 경험과 서로 간에 다져온 우애(?)가 다른 이들때문에 깨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는데, 막연한 기억으로만 쓰는 내용이니 참고했으면 한다. ^^;;

게다가 원래 로마는 군대가 국민들의 의무였으나, 카이사르 바로 앞 세대인 마리우스 때에 직업군인으로 바뀌었다. 즉, 군대를 모으고 유지하는데 돈이 들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가기 전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어서 채권자들에게 당시 최고 부자였던 크라우스가 보증을 서준 덕분에 무사히 임지로 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군단들은 주력이 중무장 보병이고, 경무장 보병, 기병대 ( 기사계급. 재산이 좀 있어 말을 구입해서 병사와 함께 제공 ) 가 대부분이었다. 공성기기를 만들거나 다리를 놓는 부대가 따로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중무장 보병들이 수행했고, 로마가 정복한 지역에서 차출된 기타 병력들도 있었다.

이때까지 로마의 기병대는 로마출신이 아닌 갈리아나 기타 지역에서 차출된 병력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로마는 말을 기르는 지역도 별로 없었고, 말을 탈만큼 재산이 많은 가문들도 많지 않아 자체적으로 기병대를 생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기사들이 말을 타기 위해 쓰는 안장은 훨씬 뒤에 발명되었기에 이때 기병들은 담요같은 것을 말위에 올려두고 양 발로 몸을 지탱해야 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로마인 출신치고는 드물게 양 팔을 놓고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었는데, 이 덕분에 신출귀몰하게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병대들과 함께 움직일 때는 주의했는데, 로마의 전통적인 중무장보병들에 비해 신뢰가 부족한 갈리아나 기타 지역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는 카이사르의 군인들로 부족함이 없어졌다.

카이사르는 이렇듯 사람을 다루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는데, 그때문에 카이사르에 적대적인 귀족아버지를 둔 자재들이 대거 카이사르 밑으로 들어와 성장했고, 이후의 로마 역사에 많은 흔적을 남긴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대개 평민들임에도 엄청난 긍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행동한다.

생각밖으로 말이 길어져서 다른 부분들은 틈틈이 끼워넣는 것이 낳다고 판단해 이만 줄인다. ^^;;




헬베티이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8년 )

갈리아 지역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부족들이 살고 있는데, 카이사르는 이들에 대해 차분히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는 로마에 비해 엄청나게 야만적인 성향인지라 다루는 게 쉽지 않았다. 약속도 쉽게 어기고 ( 로마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 속이기도 일쑤였다. 그러니 카이사르도 완전 제패 - 이를 속주화라고 하는데, 로마의 문화가 많이 유입되어 어느 정도 안정된 지역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 하는데 거의 9 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이 당시 신체조건은 게르마니아 쪽 사람들이 가장 건장했고, 갈리아 쪽 사람들은 로마 병사들 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이들은 로마 쪽에 비해 고기 등을 주로 섭취했고, 로마 병사들은 빵 등을 먹었다. 그럼에도 로마 병사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전략, 훈련, 장비들에 있었다.

로마 쪽은 뚜렷한 지휘자와 귀족 자제들이나 경험자들로 이뤄진 참모들, 장교들이 있었다.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이들의 경우, 폭발적인 힘을 낼 수는 있었지만 지구력이 떨어졌던 데 반해 밀을 주식으로 하는 로마병사들은 작고 단단한 체구에 지구력이 있었기에 전투가 길어질수록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로마 쪽은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장비면에서도 로마 쪽이 현명했는데, 두껍고 단단한 방패, 크고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는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 비해 로마의 중무장 보병들은 얇고 긴 창, 짧은 양날검, 가벼운 방패와 갑옷을 착용했다. 창은 끝이 휘어져 있어 나무로 된 방패에 박히면 잘 뽑히지 않았다. 그러기에 전투가 시작되면 적의 방패에 꽂혀 적들이 방패없이 싸우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방패로 계속 막다가 적들이 지치면 찌르기도 좋고 베기도 좋은 짧고 날카로운 양날검으로 적의 숨통을 노리는 게 기본적인 전투패턴이었다. 이런 익숙한 전술이 있기에 로마병사들은 마구잡이로 덤비는 야만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헬베티족이 문제가 된 건 게르마니아족 ( 게르만족 ) 의 위협에 못 이겨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이미 로마화 ( 혹은 속주화 ) 가 잘 진행된 지역을 지나가겠다고 했지만, 그곳의 지역주민이나 로마인들이나 이 야만족들이 조용히 지나갈 것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만가지 잡다한 상황들을 겪은 끝에 여러 부족으로 이뤄진 헬베티족을 무찌르는데, 실제 고대의 전쟁상황이 어땠는지 많이 엿볼 수 있다. 군량 주기로 한 부족이 갈팡질팡하고, 서로 내통하는 야만인들도 많고, 부녀자들이 전쟁터 근처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이때 사상자 수는 삼국지 등에 나오는 수치에 비해 믿을 만 한데, 부족단위로 이동하면서 기록을 해뒀기 때문이다. 이 수치들을 보면 갈리아 원정기간 동안 백만명 가까운 병사들을 죽였다는 게 부풀려진 숫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리오비스투스를 갈리아에서 쫓아내다. ( 기원전 58년 )

게르마니족의 왕 아리오비스투스와 맞붙은 기록이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리더로써 유능한 몇 가지 모습을 보게 되는데, 하나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병사들을 설득하는 것과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이다. 자세한 설명은 책을 읽으면서 이해할 부분이지만, 병사들에게 본분을 상기시키고 스스로 솔선수범하겠다며 압박하는 모습이 재밌다. 전투에서 승리한 것보다 볼모로 잡혀있던 병사를 살아서 만날 수 있는 것을 더 기뻐했다는 걸 기록에 남길 정도로 드러냄으로써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건 정말 진심인지 아니면 처세의 절정인지 모르겠다. ^^;;

갈리아 부임 첫 해에 카이사르는 두 번의 대규모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이 당시에는 대개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특별한 날에 전투를 하지 않기도 하고, 야간 전투도 드물었던 시대였다고 한다.


WRITTEN BY
리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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