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5 크기로 950쪽 가까이 되는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3부 성검의 폭풍 1권을 마침내 다 읽었다. ^^;; 만족도는 1, 2 부 보다 좋았는데, 아마도 티리온과 아리아 때문인 것 같다. 1,2부에 비해 화자는 꽤 많이 늘어났고, 부분적인 얘기들은 1,2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착한 주인공들이 실수도 하고, 나쁜 주인공들이 고난을 겪기 시작한다. 주요 등장인물들 중 리틀핑거와 환관 바리스가 거의 보이지 않는데, 아마 1,2부에서 메인 스토리를 이끌던 킹스랜드의 비중이 작아지고, 주인공들을 따라 가지를 친 스토리들이 살아나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개인적으로 성검의 폭중 1권에서 제일 재밌던 스토리는 산사 스타크와 티리온 라니스터가 결혼하는 것과 킹슬레이어 자이메와 브레엔느의 묘한 관계형성이었다. 대개의 스토리가 짐작도 가지 않는 " 얼음과 불의 노래 " 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충격적이면서 황당했던 게 바로 이 결혼이다. 산사가 결혼을 잘 한 거라 생각되지만, 끝까지 해피엔딩으로 남을지 모르겠다. 작가의 스타일로 봐서는 이것도 기분내키는대로 바꿔버릴 듯 싶기도 하지만, 제발 지저분하게 마무리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서양판타지는 호빗, 반지의 제왕 시리즈 정도를 읽었기에 판타지 장르에 대해 잘 모르고 지냈는데, " 얼음과 불의 노래 " 를 읽는 대장정(?)을 진행중이다보니 슬그머니 조금 더 파악해 보고 싶어졌다.

한글위키 - 판타지 소설
http://ko.wikipedia.org/wiki/%ED%8C%90%ED%83%80%EC%A7%80_%EC%86%8C%EC%84%A4

한글위키 - 하이판타지
http://ko.wikipedia.org/wiki/%ED%95%98%EC%9D%B4_%ED%8C%90%ED%83%80%EC%A7%80

" 하이판타지 " 라는 게 판타지의 서브장르로써 초자연적인 존재나 악의 군세에 맞서 싸우는 내용들이 들어있다고 하니 아마 " 얼음과 불의 노래 " 도 하이판타지 장르에 속한다고 보여진다. 앞으로 틈틈이 더 살펴봐야겠지만, 판타지 장르에 대해서는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잘 정리된 책이나 사이트를 만났으면 싶다. 그러기 전까지는 내멋대로 즐겨보련다. ^^;; ㅋㅋㅋㅋ

영문위키 - Fantasy literature
http://en.wikipedia.org/wiki/Fantasy_novel

지금까지 전개 중에 궁금한 것들이 많은데, 가중 궁금한 건 역시 1부에서 아리아 스타크가 엿들었던 음모에 관한 부분이다. 대사의 뉘앙스는 세븐킹덤 전체가 큰 전란에 휩싸이도록 만들겠다는 식이었는데, 아직까지도 그와 관련한 추가 내용들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 리틀 핑거나 바리스 둘 중 하나가 깊이 관여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갑작스레 롭 스타크의 부인이 된 여인과 그 가문은 왜 등장한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단지 프레이 가문과의 갈등을 유발하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이상하고, 롭 스타크가 전쟁을 계속하지 못하고 내부적인 갈등에 휩싸이는 어린 왕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묘사가 장황했다. 뭔가를 위한 포석으로 보여지는데, 롭 스타크라는 캐릭터는 파괴력있는 스토리를 이끌기에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다.

하운드와 그의 형과의 관계는 부차적인 얘기들 중에 재밌을 법한 소재인데, 그냥 흘러넘길 모양이다. 당최 진전이 없다.

티리온 쪽의 브렌과 샤에는 그냥 실력있는 떠돌이 기사와 철부지 창녀인 모양이다. 티리온에게 집중되어 갈수록 조명이 사그라들고 있는데, 아마 티리온 얘기가 마무리될 때쯤 희생되거나 같이 사라질 것으로 보여진다.

HBO 의 드라마와 " 성검의 폭풍 " 은 이미 내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앞으로 나올 시즌 3 에서 어떻게 그 간격을 좁힐지 기대해 본다. 개인적으로 둘 다 재밌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기다리는 시간을 때우려고 집었다가 드라마 못지 않은 재미에 빠져 있는 건 좋은데, 너무 두껍다.. 이후에는 계속 두꺼운 것으로 보여진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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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페테스족과 텡크테리족을 도륙하다 ( 기원전 55년 )

갈리아 지방으로 넘어온 야만스런 게르마니족을 크게 무찌른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갖은 꼼수를 부리던 게르마니족은 카이사르와 로마병사들의 분노를 사 끝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궤멸되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카이사르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는 자신들이 융성했을 때 괴롭히고 약탈했던 갈리족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야만족들 사이의 어리석은 관계를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 라인 강 도하 ( 기원전 55년 )

라인강을 넘어서 게르마니족에게 위세를 떨치려는 카이사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라인강 도하는 서양학자들에게 여러 관심사를 제공했는데, 그 중 어떻게 그런 짧은 시간동안 다리를 만들어 통과할 수 있었나 하는 점이었다. 몇년 전에 재현에 성공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세한 건 읽는이가 확인했으면 한다. ^^;;


첫 번째 브리탄니아 원정 ( 기원전 55년 )

드디어 영국이 역사에 등장한다. 카이사르가 브리탄니아로 건너갔다가 고생한 얘기가 나온다. 배도 부서지고, 식량도 부족했고, 처음보는 야만인들의 전투스타일에도 애를 먹었지만, 무사히 갈리아 지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야만적인 갈리족들 중 일부는 로마병사들이 전리품을 노리고 습격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당연히 따끔하게 보복한다.

로마인 이름 중 정말 특이한 이름 한개를 발견했다. 아마 전통적인 로마인은 아니었을 테고, 다른 부족이었다가 로마인으로 편입된 인물로 보여진다. 아마 이때까지는 로마시민권을 획득하는 게 엄청난 혜택이었을 것이다. 로마시민권자가 로마가도 ( 도로 ) 를 따라 여행을 하다가 습격을 당한 경우, 로마군이 이를 알게 되면 보복을 감행했기에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득이 있었다. 돌아와서 사람이름이 이래도 되나 싶은 로마인의 이름은 " 루키우스 아우룽쿨레이유스 콧타 " 이다. 도대체 어디서 살던 인물일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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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에서의 작전 실패 ( 기원전 57년 )

카이사르가 잠시 이탈리아로 간 사이에 알페스 ( 오늘날의 알프스 ) 의 고갯길에 세르비우스 갈바를 12군단과 함께 파견했는데, 이는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전투를 하지 않던 월동시기였는데, 갈리아 부족이 습격해와 전투를 치룬 후, 여건이 좋지 않자 갈바는 로마화되어 있는 속주로 이동한다. 여기서도 로마의 경험많은 중무장 보병들이 그 역량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갈리아족이 로마에 덤빈 이유가 잘못되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사실상 로마는 상인들의 교류나 속주의 안정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교통요지 혹은 방어를 위한 주요 지역을 점령해 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갈리아인들에 비해 관세를 조금 덜 받거나 야만적인 행위는 조금 덜해지긴 하겠지만,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이런 차이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카이사르는 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월동기간동안 갈리아를 떠나있거나 로마와 연락을 자주 취해야 했다. 당시 로마는 많은 수의 귀족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공화정이었는데,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해 먹고 살기 힘든 민중들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험난하고 피곤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복잡한 국내 정치도 조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군단도 전투를 통해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지시가 없어도 살아움직이듯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서양 연안 전투 ( 기원전 56년 )

오늘날의 영국 땅을 바다 건너로 바라보는 갈리아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를 얘기한다. 지중해의 잔잔한 바다에 적합했던 로마군의 배가 대서양의 험난한 바다에는 맞지 않았으나 로마군의 장점이었던 적응력 덕분에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삼두정치의 한 주역이었던 졸부 크라수스의 아들로 보인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이 청년을 매우 아꼈으며, 푸블리우스 크랏수스 역시 이에 보답할 만큼 뛰어난 인재였다고 한다. 갈리아 원정기에서 사람 이름 앞에 웬만해서는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는데, 푸블리우스 크랏수스에게만은 여러 곳에서 " 젊은 " 이라는 단어를 일부로 붙인 게 그 증거라고 한다. 이후에 활약상이 좀 나오는데, 아쉽게도 아버지인 졸부 크랏수스가 파르티아 ( 소아시아 혹은 페르시아 ) 지역으로 원정을 간다기에 불려갔다가 같이 죽는다. 이 부분을 떠올리면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 바보는 혼자 죽지 않는다.. '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종종 보인다.



아퀴타니아에서 이기다 ( 기원전 56년 )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가 카이사르 없이도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해낸다. 재밌는 건 로마친화적인 갈리아족들에게 원군을 요청해 전투시 평소의 3열횡대가 아닌 2열횡대로 포진했다는 점이다. 로마군 사이에 갈리아 원군을 한명씩 번갈아 배치해 전쟁 중에 도망가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도록 했단다. 젊은 푸블리우스 크랏수스라고 불릴만큼 영민해 보인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귀족과 대립하는 인물이면서도 로마 귀족들의 자제들을 많이 데리고 갈리아로 원정을 왔다. 이런 부분을 속쓰려하는 로마 귀족들 중에 졸부 크랏수스와 언변의 달인 키케로 등이 있었다.


모리니족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다 ( 기원전 56년 )

평야나 언덕 등지에서 서로 군대를 포진해 싸우는 대회전 방식에서는 도저히 로마군을 이길 수 없자 게릴라 전이 등장한다. 로마군도 별 수 없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해 꼼꼼한 방식으로 전환한다.

로마군은 전투에서 이기고, 볼모를 잡고, 무기를 회수한 뒤 지속적인 보급품을 요구하는 확실하고 지속적인 점령방식을 사용했다. 볼모들은 포로대접이 아니라 로마 귀족과 비슷한 교육 및 생활상을 익히게 한 후 돌려보내 갈리아지역에서도 로마식으로 살아가는 스타일이 퍼지도록 유도했다. 이는 군복무를 끝낸 로마군들에게 점령지의 땅을 주어 정착하게 하는 것과 함께 로마 제국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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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가이족 동맹의 와해 ( 기원전 57년 )

로마의 외교전략인 " 나눠서 정복하라 " ( divide and conquer 였나? ^^;; ) 가 전쟁 상황에서 적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카이사르는 적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때에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나타남으로써 기선을 제압해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주로 협약을 맺거나 정보를 얻고, 실제 전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질 때는 충분한 계산이 서지 않는 한 시작하지 않는다. 야만스런 병사들의 약점 중 하나가 도발에 약하다는 건데, 로마병사 역시 상대가 얕보고 도발하는 것에 불끈해 하지만, 그보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을 더 수치스러워 하는 것이 장점이었다.




벨가이족 부족들을 각개격파하다. ( 기원전 57년 )

카이사르의 군단이 네르비이족에게 심각한 기습을 받는 장면에서 유능한 병사들 혹은 베테랑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습을 받게 되었을 때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태에서 스스로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수습하고 대처해간다. 이 과정에서 양 쪽은 많은 사상자를 낸다. 이런 전투는 양쪽이 다 양질의 병사들일 가능성이 높다. 용감하기도 하고, 목적의식도 분명히 분위게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기에 죽을 때까지 싸웠기 때문이다. 대개 한쪽이라도 어설픈 진영이 있으면 사상자보다 분위기에 따라 승패가 결정날 때가 많은 게 이 당시의 전투였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베테랑들 혹은 중간관리자들이 많을수록 좋은 사회나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는 믿고 따를만한 중간관리자들 혹은 스스로 적절하게 처신할 수 있는 중산층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이렇게 혼란스러운게 아닐까 싶다. 언제나 위기는 좋은 시험대이기는 하지만, 처참하게 밟힐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알게 되는 서글픈 때이기도 하다. 버티면 이길 수 있다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아직 보지 못했다. ㅡㅡ;;

로마의 군대는 대개 3열횡대가 기본이었으며, 1, 2 열이 초반과 중반까지의 전투를 담당하고 3열이 전투를 마무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대개 신참이나 아직 경험이 적은 병사들이 1, 2 열을 맡았고, 유능하고 오랫동안 복무한 병사들이 3열을 맡곤 했다. 또한 10 개의 대대들도 제각각 약간의 서열이 있었고, 참모장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능한 장군들은 이런 세분화된 군사들을 적절히 재배치해서 전투에 임했으며, 중요 역할을 맡은 병사들은 긍지를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10군단에 이어 9군단도 카이사르가 총애하는 군단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서너개의 군단이 카이사르의 사병처럼 여겨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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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아 원정기 " 1권은 2 개의 부제가 있다. " 헬베티이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8년 ) " 과 " 아리오비스투스를 갈리아에서 쫓아내다 ( 기원전 58년 ) " 이 그것이다. 카이사르가 쓴 " 갈리아 원정기 " 의 첫부분을 따라해 봤다. ^^;;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책의 도입부와 같이  간결하고 효율적인데다 상대방이 예측하지 못하는 단도직입적인 자세가 일품이다. 그렇지만 기원전 58년 안팎의 로마와 갈리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면 이런 직선적인 서술을 읽어가기에 난감한 부분들이 있기에 간략하게나마 참고가 될만한 얘기들을 먼저 적어둔다.

이 당시 로마군은 1개 군단의 정원이 6천명이지만, 카이사르의 군단들만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3천 5백명 안팎이었다. 천병희님의 설명에는 마치 대개의 로마군단이 6천명 이하인 것처럼 씌여졌는데, 다른 총독이나 장군들은 결원을 보충해 대개 6천명 가까이 되는 정원을 채워놓곤 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긴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군단별 혹은 그 밑의 대대별 ( 코호르스 ) 로 부대의 순수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엄한 놈이나 실력없는 놈, 분위기에 맞지 않는 놈이 들어와서 부대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원이 생겨도 내버려뒀다고 한다.

부대원들 역시 그런 카이사르의 방식을 존중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사람이 부족해도 남은 군인들이 충분히 다른 부대와 똑같은 몫을 해줄 수 있다는 카이사르의 신뢰에 긍지를 느끼기도 했고, 혹독한 경험과 서로 간에 다져온 우애(?)가 다른 이들때문에 깨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는데, 막연한 기억으로만 쓰는 내용이니 참고했으면 한다. ^^;;

게다가 원래 로마는 군대가 국민들의 의무였으나, 카이사르 바로 앞 세대인 마리우스 때에 직업군인으로 바뀌었다. 즉, 군대를 모으고 유지하는데 돈이 들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가기 전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어서 채권자들에게 당시 최고 부자였던 크라우스가 보증을 서준 덕분에 무사히 임지로 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군단들은 주력이 중무장 보병이고, 경무장 보병, 기병대 ( 기사계급. 재산이 좀 있어 말을 구입해서 병사와 함께 제공 ) 가 대부분이었다. 공성기기를 만들거나 다리를 놓는 부대가 따로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중무장 보병들이 수행했고, 로마가 정복한 지역에서 차출된 기타 병력들도 있었다.

이때까지 로마의 기병대는 로마출신이 아닌 갈리아나 기타 지역에서 차출된 병력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로마는 말을 기르는 지역도 별로 없었고, 말을 탈만큼 재산이 많은 가문들도 많지 않아 자체적으로 기병대를 생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기사들이 말을 타기 위해 쓰는 안장은 훨씬 뒤에 발명되었기에 이때 기병들은 담요같은 것을 말위에 올려두고 양 발로 몸을 지탱해야 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로마인 출신치고는 드물게 양 팔을 놓고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었는데, 이 덕분에 신출귀몰하게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병대들과 함께 움직일 때는 주의했는데, 로마의 전통적인 중무장보병들에 비해 신뢰가 부족한 갈리아나 기타 지역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는 카이사르의 군인들로 부족함이 없어졌다.

카이사르는 이렇듯 사람을 다루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는데, 그때문에 카이사르에 적대적인 귀족아버지를 둔 자재들이 대거 카이사르 밑으로 들어와 성장했고, 이후의 로마 역사에 많은 흔적을 남긴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대개 평민들임에도 엄청난 긍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행동한다.

생각밖으로 말이 길어져서 다른 부분들은 틈틈이 끼워넣는 것이 낳다고 판단해 이만 줄인다. ^^;;




헬베티이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8년 )

갈리아 지역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부족들이 살고 있는데, 카이사르는 이들에 대해 차분히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는 로마에 비해 엄청나게 야만적인 성향인지라 다루는 게 쉽지 않았다. 약속도 쉽게 어기고 ( 로마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 속이기도 일쑤였다. 그러니 카이사르도 완전 제패 - 이를 속주화라고 하는데, 로마의 문화가 많이 유입되어 어느 정도 안정된 지역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 하는데 거의 9 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이 당시 신체조건은 게르마니아 쪽 사람들이 가장 건장했고, 갈리아 쪽 사람들은 로마 병사들 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이들은 로마 쪽에 비해 고기 등을 주로 섭취했고, 로마 병사들은 빵 등을 먹었다. 그럼에도 로마 병사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전략, 훈련, 장비들에 있었다.

로마 쪽은 뚜렷한 지휘자와 귀족 자제들이나 경험자들로 이뤄진 참모들, 장교들이 있었다.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이들의 경우, 폭발적인 힘을 낼 수는 있었지만 지구력이 떨어졌던 데 반해 밀을 주식으로 하는 로마병사들은 작고 단단한 체구에 지구력이 있었기에 전투가 길어질수록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로마 쪽은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장비면에서도 로마 쪽이 현명했는데, 두껍고 단단한 방패, 크고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는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 비해 로마의 중무장 보병들은 얇고 긴 창, 짧은 양날검, 가벼운 방패와 갑옷을 착용했다. 창은 끝이 휘어져 있어 나무로 된 방패에 박히면 잘 뽑히지 않았다. 그러기에 전투가 시작되면 적의 방패에 꽂혀 적들이 방패없이 싸우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방패로 계속 막다가 적들이 지치면 찌르기도 좋고 베기도 좋은 짧고 날카로운 양날검으로 적의 숨통을 노리는 게 기본적인 전투패턴이었다. 이런 익숙한 전술이 있기에 로마병사들은 마구잡이로 덤비는 야만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헬베티족이 문제가 된 건 게르마니아족 ( 게르만족 ) 의 위협에 못 이겨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이미 로마화 ( 혹은 속주화 ) 가 잘 진행된 지역을 지나가겠다고 했지만, 그곳의 지역주민이나 로마인들이나 이 야만족들이 조용히 지나갈 것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만가지 잡다한 상황들을 겪은 끝에 여러 부족으로 이뤄진 헬베티족을 무찌르는데, 실제 고대의 전쟁상황이 어땠는지 많이 엿볼 수 있다. 군량 주기로 한 부족이 갈팡질팡하고, 서로 내통하는 야만인들도 많고, 부녀자들이 전쟁터 근처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이때 사상자 수는 삼국지 등에 나오는 수치에 비해 믿을 만 한데, 부족단위로 이동하면서 기록을 해뒀기 때문이다. 이 수치들을 보면 갈리아 원정기간 동안 백만명 가까운 병사들을 죽였다는 게 부풀려진 숫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리오비스투스를 갈리아에서 쫓아내다. ( 기원전 58년 )

게르마니족의 왕 아리오비스투스와 맞붙은 기록이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리더로써 유능한 몇 가지 모습을 보게 되는데, 하나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병사들을 설득하는 것과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이다. 자세한 설명은 책을 읽으면서 이해할 부분이지만, 병사들에게 본분을 상기시키고 스스로 솔선수범하겠다며 압박하는 모습이 재밌다. 전투에서 승리한 것보다 볼모로 잡혀있던 병사를 살아서 만날 수 있는 것을 더 기뻐했다는 걸 기록에 남길 정도로 드러냄으로써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건 정말 진심인지 아니면 처세의 절정인지 모르겠다. ^^;;

갈리아 부임 첫 해에 카이사르는 두 번의 대규모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이 당시에는 대개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특별한 날에 전투를 하지 않기도 하고, 야간 전투도 드물었던 시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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