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쪽을 완전히 제패한 뒤 카이사르는 마침내 폼페이우스와 그를 따르는 원로원 의원들을 처리하기 위해 그리스로 떠난다. 3권은 카이사르가 내전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이집트에서 벌어진 알렉산드리아 전쟁 직전까지 기록되었다.

" 내전기 " 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여전히 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 에 대한 평가는 낮아지고 있다. 볼품없는 작품이라는 뜻이 아니라 명작계열보다 수작계열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맞겠다. ^^;;


전쟁을 준비하는 폼페이우스
에피루스 회담
카일리우스의 반란
안토니우스의 시련
마케도니아의 부정들
다라키움 공방전
카이사르의 작전, 실패하다
카이사르, 테살리아로 가다
품페이우스의 추격
최대의 결전, 파르살루스 대전투
폼페이우스의 최후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내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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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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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 사이의 전쟁이면서도 당시에는 사실상의 세계대전이었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은 일진일퇴 끝에 카이사르의 승리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동안은 카이사르가 병력수는 작지만 고참병을 주로 거느리고 있었던 반면,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두 배에 가까운 병력에 전쟁경험이 부족한 신참들 위주여서 이게 승리의 주요 열쇠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못지 않게 중요했던 점을 발견했다. 바로 연습이다. ^^;;

파르살루스 회전 ( 평야 같은 곳에서 군사들끼리 포진해 싸우는 것 ) 을 앞두고 카이사르의 병력은 책의 설명에 따르면 로마 중무장 보병 6개 군단 2만 7천 명과 기병 2천기인데, " 내전기 " 에 따르면 보병이 2만 2천에 기병이 1천기였다. 아마 현지에서 충원한 경무장 보병과 기병들 때문에 수치가 다른 것 같다.

여기서 짚고 싶은 게 바로 이 경무장 보병들과 주요 고참병들을 파르살루스 회전 직전까지 여러 차례 카이사르 자신이 예측한 전투의 진행형태에 맞게 훈련시켰다는 점이다. 적의 기병들을 막기 위해 정예 중의 정예들인 고참병들만 따로 모아 4번째 대열로 별도의 부대를 만든 후, 그 빈자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로마 중무장 보병들 사이에 경무장 보병들을 끼워 넣고, 전투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호흡을 맞췄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나 플루타르크는 이런 점을 별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 내전기 " 를 보니 카이사르와 함께 갈리아에서 전쟁을 치루면서 경험을 쌓았던 2 개 군단이 폼페이우스에게는 고스란히 남아있었기에 단순히 고참병들의 수치때문에 전쟁수행능력이 더 뛰어나서 카이사르가 이겼다고 하기에는 전투결과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2퍼센트 부족한 설명으로 보여진다.

카이사르의 핵심 군단들은 9, 10, 11, 12 군단(?) 정도였고, 1개 군단의 정원인 6천명에 훨씬 못 미치는 3천 6백여명(?) 이하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9 군단은 파르살루스 회전 직전의 전투였던 다라키움 공방전 ( 고지나 진지를 두고 벌인 전투? ) 에서 심각한 병력 감소가 있었기에 2만 2천의 중무장 보병 중 전투경험이 풍부한 고참병의 비율은 높긴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말한 것처럼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 8 대 2 정도로 묘사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 내전기 " 에 따르면 6 대 4 정도로 보여진다. 4 정도의 신참비율도 분명 전쟁경험을 갖고 있긴 하지만 많은 정도는 아니고, 그 정도의 전쟁경험은 폼페이우스 측의 로마 중무장 보병들도 가지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압도적으로 폼페이우스 진영을 패퇴시킬 수 있었던 건 현실에 맞는 기발한 발상, 고참병을 활용한 전쟁수행 능력 그리고 부족한 요소를 메꾸는 훈련의 결과였다고 본다. 전투가 벌어지면 너무 역동적인데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도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기에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이런 부족분을 카이사르는 훈련을 통해 메꿔 경무장 보병들이 등을 돌리고 달아나거나 우왕좌왕하지 않고 제 몫을 다하도록 만들었기에 두 배에 가까운 병력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고참병들이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을 막아도 보병대열이 뚫리거나 밀리면 전투의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은 수에 고참까지 빠져 나간 자리를 이질적인 경무장 보병들로 채우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에 반해 폼페이우스 진영은 부족분인 경험을 메꿀 생각보다 압도적인 병력수의 차이만 믿고 논공행상부터 하다가 자멸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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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쪽 번역작들은 천병희님의 솜씨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아쉽게도 카이사르의 " 내전기 " 는 아직 번역하지 않으신 듯 보였다. 대신 2005년에 김한영이란 분이 번역하고 사이 출판사에서 나온 " 내전기 " 를 골랐는데, 기대이상의 품질이라 즐겁게 읽고 있다. ^^;;

" Caesar : The Civil War " ( Harvard University Press ) 라는 영어출판물(?)을 원전으로 삼았다는데, 다행이 그곳의 서문, 지도, 삽화같은 것들도 고스란히 옮겨온 듯 보인다. 병장기들도 어느 정도 볼거리를 제공해 좋았다. " 내전기 " 는 모두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사이 출판사에서 한 권으로 묶어 번역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 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는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갈리아 원정기, 그리고 내전기까지 거쳐 오면서 상당히 거품이 빠진 상태다. 전문가에 비해 상당히 적은 사료(?)들을 읽은 수준이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책에서 말한 내용들이 혁신적인 가설이라기 보다 소설가의 로마사 감상기같은 것에 가깝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뭐 깊이 논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를 버리고 그리스 쪽으로 떠난 폼페이우스의 행동이 그의 주요 패착 중 하나라고 지적한 부분에 대해 이제는 별로 공감가지 않는다. 적어도 " 내전기 " 에 따르면 로마와 그 주변의 군사력이 될 수 있는 민중들은 친카이사르 세력이었던 것으로 암시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곳에서 농성전을 치루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좀 더 강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료(?)를 읽어야 하는데.. 귀찮다.. ㅋㅋㅋ

카이사르의내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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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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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로마 안에서의 음모
카이사르의 반격
코르피니움 정복
폼페이우스, 로마를 탈출하다
로마, 무혈입성하다
마실리아의 전운
일레르다, 카이사르를 고립시키다
브루투스의 해전 승전보
카이사르의 승리, 히스파니아 전투

" 주사위는 던져졌다 " 라고 말하는 에피소드는 " 내전기 " 에 나오는 것이 아님에도 마치 여기서 나오는 것처럼 광고해 놓은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제발 이러지 말자. 좋은 책에 이런 식으로 낚시질하면 오히려 역효과라고 판단된다. " 주사위는 던져졌다 " 라는 카피(?)는 아마 카이사르를 다루는 책이라면 다 써먹을 얘기인데, 정작 " 내전기 " 책내용에서는 그 부분을 훌쩍 뛰어넘어버려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으니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이 에피소드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카이사르편이나 그밖의 몇몇 고전에서 소개되고 있고, 정작 카이사르가 쓴 " 내전기 " 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카이사르가 " 내전기 " 를 쓸 때가 언제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 내전기 " 를 쓸 때의 마음이나 정신은 몹시 긴장되어 있고, 복잡했을 것이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다. " 갈리아 원정기 " 에 비해 실수한 부분도 많고, 뭔가 감춰진 듯한 느낌을 주는 곳도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쟁을 치루면서 그 전쟁의 핵심인물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면서 전쟁문학에서도 다룰 만큼 담백하게 잘 씌여진 책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카이사르의 연설문 전체를 볼 수 있는 점이 좋았고, ( 시오노 나나미나 플루타르크는 요약해서 설명해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 전쟁과 정치를 동시에 수행했던 사람의 역량과 멋진 전술을 구사했던 명장들의 마인드를 비교해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카이사르는 한참 이전 세대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전쟁과 정치를 동시에 치뤄내는 리더였던 카이사르는 로마인들과 로마 병사들이 만들어낸 영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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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원정기 중에서 유일하게 카이사르가 쓰지 않은 부분이다. 갈리아 전쟁의 상황을 살펴보는 재미 외에도 당시를 살았던 카이사르와 다른 이의 문장을 비교해 볼 수 있어 좋다. 히르티우스는 카이사르의 측근 중 한 명으로 해방노예 쯤으로 기익된다.


히르티우스의 머리말

같은 카이사르의 측근 중 한 명인 발부스에게 카이사르의 뜻에 따라 저서의 나머지 부분을 쓰게 됐다는 얘기를 전한다.



비투리게스족, 카르누테스족, 벨로바키족의 반란 ( 기원전 52 ~ 51년 )

갈리아 전쟁 내내 갈리족들이 그랬듯이, 로마군의 병력이 많지 않은 것을 빌미삼아 사람들을 충동질하는 인물들이 아직 몇몇 남아 있어 이들을 마무리짓고 있다.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지만, 대개의 제국주의가 그러하듯 마지막은 엄하고 확실하게 다뤄두려고 한다.



마지막 교전 : 욱셀로두눔의 함락 ( 기원전 51년 )

공성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성 안의 방어태세와 병력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방어가 허술한 부분이 있다면 적이 모르게 그 부분을 가장 짧은 시간에 점령한 후 파고 들어가는 것이 기본으로 보인다. 대개 적이 성 안으로 숨었다면 아군의 전력이 강한 것이고, 침투경로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으로 방어가 견고하다면 성 안의 물자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먹을 것이든, 물이든 혹은 질병이든 성 안의 군사와 일반인들을 동요시킬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확인한 후 농성전에 대비해야 한다. 카이사르는 이곳에서 물의 공급을 차단해 승리한다.

카이사르 이전 세대로 로마와 이탈리아를 10년간 유린했던 한니발이 공성전에 약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비교해 볼 만 한다. 한니발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명장이다.



내란의 먹구름이 드리우다.

로마의 귀족들이 카이사르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했다는 정보까지 파악되자 카이사를 별 수 없이 로마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내전을 피하기 위해 여러 의견을 로마 원로원에 제안하지만, 끝내 거절당하자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된다.



조만간 " 내전기 " 를 읽어봐야겠다. 거침없던 카이사르조차도 " 내전기 " 에서는 그 속내를 전부 드러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문장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혹은 읽는이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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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베리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3년 )

카이사르와 라비에누스의 활약상이 정리되어 있다. 트레베리족을 평정하는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사용한 유인책을 똑같이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단지 연설할 때 내용만 다를 뿐이었다. " 여러분은 우리 사령관인 카이사르에게 그토록 자주 보여주던 것과 같은 용기를 지금 지휘관인 나에게도 보여주시오. " 라고..




두 번째 라인 강 도하 ( 기원전 53년 )

게르마니아는 일부 부족들에게만 로마의 영향이 퍼진 상태라 여전히 갈리족의 내분을 틈타 병력을 보내고 있기에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라인강을 건너려고 한다.

두 번째 도하인지라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여러 풍습과 문화를 기록해 뒀는데, 제법 재밌다.


갈리족의 관습과 제도

싸움을 하는 기사 ( 혹은 전사 ) 계급과 종교를 주재하는 드루이데스 ( 혹은 드루이드 ) 들이 존중받는 계급이며 그밖에는 별반 차이없이 고달팠다고 한다. 미신이 유행했음에도 아폴로, 마르스, 미네르바 등의 신들을 숭배했고, 그 중 메르쿠리우스가 으뜸이었다고 한다.

갈리족은 자신들이 모두 " 디스 " 라는 한 아버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는데, 디스는 저승의 신 플루토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게르마니족의 관습과 제도

싸움 잘하기로 유명한 게르마니족은 우유, 치즈, 육류를 주로 섭취하고, 주변에 넓은 황무지를 갖고 있는 게 자랑이었다고 한다. 성문제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단다.

두 뿔 사이에 또다른 거대한 뿔이 있다는 소와 엘크라고 하는 넘어지면 못 일어나는 동물, 그리고 난폭한 들소를 봤다고 카이사르는 주장하는데, 제일 처음 말한 동물이 아마 유니콘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으나, 비현실적인 얘기라 카이사르가 오해했을 것이라는 게 더 상식적으로 보인다.




에부로네스족의 나라를 초토화하다 ( 기원전 53년 )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말했다. 전쟁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고, 운도 전쟁의 큰 요소 중 하나라고. 오늘날에도 통용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에부로네스족과의 전투는 멋진 지휘보다는 난잡한 세력싸움에 가까웠다. 카이사르는 주변의 우호적인 부족들과 자신의 주력부대를 동원해 가능한한 넓은 지역에서 에부로네스족을 괴롭혔는데, 그 빈틈을 뚫고 다른 외부세력이 로마군의 기지를 급습한다. 로마군 스스로 겁에 질렸다는 표현이 이곳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아마 이때가 신입으로 들어온 병사들이 가장 많은 때로 보인다. 카이사르는 기지로 돌아와 기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만 지적한다. 그밖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신참들이라 주력병력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두 번째 라인강 도하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났다. 신참들의 병사를 좀 잃기는 했어도 나름 전쟁경험을 쌓았고, 정보도 많이 수집했으며, 게르마니족의 영토를 초토화시키며 위세를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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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아 원정기 " 1권은 2 개의 부제가 있다. " 헬베티이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8년 ) " 과 " 아리오비스투스를 갈리아에서 쫓아내다 ( 기원전 58년 ) " 이 그것이다. 카이사르가 쓴 " 갈리아 원정기 " 의 첫부분을 따라해 봤다. ^^;;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책의 도입부와 같이  간결하고 효율적인데다 상대방이 예측하지 못하는 단도직입적인 자세가 일품이다. 그렇지만 기원전 58년 안팎의 로마와 갈리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면 이런 직선적인 서술을 읽어가기에 난감한 부분들이 있기에 간략하게나마 참고가 될만한 얘기들을 먼저 적어둔다.

이 당시 로마군은 1개 군단의 정원이 6천명이지만, 카이사르의 군단들만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3천 5백명 안팎이었다. 천병희님의 설명에는 마치 대개의 로마군단이 6천명 이하인 것처럼 씌여졌는데, 다른 총독이나 장군들은 결원을 보충해 대개 6천명 가까이 되는 정원을 채워놓곤 했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긴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군단별 혹은 그 밑의 대대별 ( 코호르스 ) 로 부대의 순수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엄한 놈이나 실력없는 놈, 분위기에 맞지 않는 놈이 들어와서 부대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원이 생겨도 내버려뒀다고 한다.

부대원들 역시 그런 카이사르의 방식을 존중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사람이 부족해도 남은 군인들이 충분히 다른 부대와 똑같은 몫을 해줄 수 있다는 카이사르의 신뢰에 긍지를 느끼기도 했고, 혹독한 경험과 서로 간에 다져온 우애(?)가 다른 이들때문에 깨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는데, 막연한 기억으로만 쓰는 내용이니 참고했으면 한다. ^^;;

게다가 원래 로마는 군대가 국민들의 의무였으나, 카이사르 바로 앞 세대인 마리우스 때에 직업군인으로 바뀌었다. 즉, 군대를 모으고 유지하는데 돈이 들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가기 전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어서 채권자들에게 당시 최고 부자였던 크라우스가 보증을 서준 덕분에 무사히 임지로 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군단들은 주력이 중무장 보병이고, 경무장 보병, 기병대 ( 기사계급. 재산이 좀 있어 말을 구입해서 병사와 함께 제공 ) 가 대부분이었다. 공성기기를 만들거나 다리를 놓는 부대가 따로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중무장 보병들이 수행했고, 로마가 정복한 지역에서 차출된 기타 병력들도 있었다.

이때까지 로마의 기병대는 로마출신이 아닌 갈리아나 기타 지역에서 차출된 병력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로마는 말을 기르는 지역도 별로 없었고, 말을 탈만큼 재산이 많은 가문들도 많지 않아 자체적으로 기병대를 생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기사들이 말을 타기 위해 쓰는 안장은 훨씬 뒤에 발명되었기에 이때 기병들은 담요같은 것을 말위에 올려두고 양 발로 몸을 지탱해야 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로마인 출신치고는 드물게 양 팔을 놓고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었는데, 이 덕분에 신출귀몰하게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병대들과 함께 움직일 때는 주의했는데, 로마의 전통적인 중무장보병들에 비해 신뢰가 부족한 갈리아나 기타 지역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는 카이사르의 군인들로 부족함이 없어졌다.

카이사르는 이렇듯 사람을 다루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는데, 그때문에 카이사르에 적대적인 귀족아버지를 둔 자재들이 대거 카이사르 밑으로 들어와 성장했고, 이후의 로마 역사에 많은 흔적을 남긴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대개 평민들임에도 엄청난 긍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행동한다.

생각밖으로 말이 길어져서 다른 부분들은 틈틈이 끼워넣는 것이 낳다고 판단해 이만 줄인다. ^^;;




헬베티이족을 격퇴하다. ( 기원전 58년 )

갈리아 지역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부족들이 살고 있는데, 카이사르는 이들에 대해 차분히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는 로마에 비해 엄청나게 야만적인 성향인지라 다루는 게 쉽지 않았다. 약속도 쉽게 어기고 ( 로마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 속이기도 일쑤였다. 그러니 카이사르도 완전 제패 - 이를 속주화라고 하는데, 로마의 문화가 많이 유입되어 어느 정도 안정된 지역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 하는데 거의 9 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이 당시 신체조건은 게르마니아 쪽 사람들이 가장 건장했고, 갈리아 쪽 사람들은 로마 병사들 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이들은 로마 쪽에 비해 고기 등을 주로 섭취했고, 로마 병사들은 빵 등을 먹었다. 그럼에도 로마 병사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전략, 훈련, 장비들에 있었다.

로마 쪽은 뚜렷한 지휘자와 귀족 자제들이나 경험자들로 이뤄진 참모들, 장교들이 있었다.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이들의 경우, 폭발적인 힘을 낼 수는 있었지만 지구력이 떨어졌던 데 반해 밀을 주식으로 하는 로마병사들은 작고 단단한 체구에 지구력이 있었기에 전투가 길어질수록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로마 쪽은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장비면에서도 로마 쪽이 현명했는데, 두껍고 단단한 방패, 크고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는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 비해 로마의 중무장 보병들은 얇고 긴 창, 짧은 양날검, 가벼운 방패와 갑옷을 착용했다. 창은 끝이 휘어져 있어 나무로 된 방패에 박히면 잘 뽑히지 않았다. 그러기에 전투가 시작되면 적의 방패에 꽂혀 적들이 방패없이 싸우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방패로 계속 막다가 적들이 지치면 찌르기도 좋고 베기도 좋은 짧고 날카로운 양날검으로 적의 숨통을 노리는 게 기본적인 전투패턴이었다. 이런 익숙한 전술이 있기에 로마병사들은 마구잡이로 덤비는 야만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헬베티족이 문제가 된 건 게르마니아족 ( 게르만족 ) 의 위협에 못 이겨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이미 로마화 ( 혹은 속주화 ) 가 잘 진행된 지역을 지나가겠다고 했지만, 그곳의 지역주민이나 로마인들이나 이 야만족들이 조용히 지나갈 것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만가지 잡다한 상황들을 겪은 끝에 여러 부족으로 이뤄진 헬베티족을 무찌르는데, 실제 고대의 전쟁상황이 어땠는지 많이 엿볼 수 있다. 군량 주기로 한 부족이 갈팡질팡하고, 서로 내통하는 야만인들도 많고, 부녀자들이 전쟁터 근처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이때 사상자 수는 삼국지 등에 나오는 수치에 비해 믿을 만 한데, 부족단위로 이동하면서 기록을 해뒀기 때문이다. 이 수치들을 보면 갈리아 원정기간 동안 백만명 가까운 병사들을 죽였다는 게 부풀려진 숫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리오비스투스를 갈리아에서 쫓아내다. ( 기원전 58년 )

게르마니족의 왕 아리오비스투스와 맞붙은 기록이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리더로써 유능한 몇 가지 모습을 보게 되는데, 하나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병사들을 설득하는 것과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이다. 자세한 설명은 책을 읽으면서 이해할 부분이지만, 병사들에게 본분을 상기시키고 스스로 솔선수범하겠다며 압박하는 모습이 재밌다. 전투에서 승리한 것보다 볼모로 잡혀있던 병사를 살아서 만날 수 있는 것을 더 기뻐했다는 걸 기록에 남길 정도로 드러냄으로써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건 정말 진심인지 아니면 처세의 절정인지 모르겠다. ^^;;

갈리아 부임 첫 해에 카이사르는 두 번의 대규모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이 당시에는 대개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특별한 날에 전투를 하지 않기도 하고, 야간 전투도 드물었던 시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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