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는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인데, EBS의 TV화면으로 감상했다. 

1920년대의 아일랜드가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두 형제가 살아간 모습을 다룬 영화인데, 그들의 신념 속에서 식민지 국가 (혹은 약소국)의 비애와 내부적 갈등을 현실적으로 잘 그려냈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시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드라마 장르에 속하지만 감정에 호소하려는 연출이 보이지 않고, 전쟁영화로 볼 수도 있지만 스펙타클한 장면은 없다. 그저 맑은 하늘과 광활한 대지에서 장총과 권총으로 투쟁하는 아일랜드인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모습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데, 역사적 사실들과 그 메시지들을 전해주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고 보여진다. 

이런 화면 혹은 스토리 전개는 개인적으로 쿨하게 느껴지지만, 종종 기승전결이 없는 것처럼 보는 이들도 있다. 대개 액션영화를 좋아하고 복잡한 스토리나 심리적인 요소가 다분한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이들한테서 발견되는데 취향이니 존중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즐기지 못하는 영화는 무수히 많다. ^^;;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41956&t__nil_story=tabName 

http://ebsstory.blog.me/50183191435

어떤 글에서는 켄 로치가 공평한 시선으로 영국군과 아일랜드 저항군(?)을 다루고 있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교묘하게 표현했다고 보여진다. 2006년에 70세이셨던 분에게 "교묘하다"라는 표현이 좀 죄송스럽지만, 영화 초반 영국군이 아일랜드인에게 핍박을 가한 후에 죽이는 것과 아일랜드 저항군이 영국군에게 테러를 감행하는 것은 다 같은 폭력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전자의 폭력은 울분을 느끼게 하는 반면 후자의 폭력은 다급함이 느껴졌다. 양 쪽이 모두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똑같은 무게로 비춰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은 영화 후반 아일랜드인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토론에서도 보여지는데, 지주들의 존재가치를 옹호하는 입장 혹은 영국과의 조약체결을 지지하는 입장에 선 아일랜드인의 모습은 상당히 궤변적이다. 아마 "좌파감독"의 성향이 본능적으로 묻어나는게 아닐까 싶다. ^^;;


"당신이 무엇에 대항해서 싸우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아는 건 아주 다른 일이다. " 
"It's easy to know what you are against, but quite another to know what you are for."
- 출처 : http://www.imdb.com/title/tt0460989/trivia?tab=qt&ref_=tt_trv_qu 


조약내용이 아일랜드를 분열시키고, 정치상황을 영국에 종속되도록 유도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이득(각종 세금과 경제제도)이 많으니 조약을 체결하자는 측은 지주들의 자금을 지원받아 군자금을 마련하여 자주독립을 이룩하자는 쪽과 연결선상에 있다. 반면 아일랜드가 분열되는 것, 영국 왕실에 충성을 서약하는 것 자체가 이미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공정한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쪽과 함께 한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독립하느냐를 두고 그 분열상을 드러내도록 조약내용을 제시한 영국의 정치책략에 그대로 놀아났다는 게 개인적인 판단이다.

한 나라를 공략할 때는 배신자로 추출할 만한 집단이 있는지 확인한 후, 없으면 지주계급과 서민계급의 이익이 충돌하도록 유도해서 서로 나뉘게 한 뒤 한쪽을 극도록 약화시키고 나머지를 정복하는 것이 기본적인 전략 중 하나다. 

그 중에서도 지주계급은 어느 정도 영악하게 굴만한 지능을 가지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게 몸에 밴 사람들이라 강대국이나 점령국에서는 이용가치가 크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눈에 띄는 배우는 단연 주인공인 킬리언 머피(데미언)이긴 하지만, 그 옆에서 서민의 목소리를 내고 보좌해주는 "댄"역의 리암 커닝엄도 볼 만하다. 이 사람이 "왕좌의 게임" 시리즈에 등장하는 양파의 기사다. 처음 봤을 때 웬 어설픈 "장 르노" 닮은 꼴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작품성있는 곳에서만 접하게 되서 다시 보게 됐다. 감옥 안에서 데미언과 댄이 재회했을 때 사실 댄이 프락치(밀정) 역할이 아닐까 영화 내내 의심했다. 스릴러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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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섣부른 마음에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제7의 봉인"을 본 뒤 아마도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 적이 있었다. 온갖 찬사들을 그냥 받아들이기도 싫었고, 스스로 되새김질을 해보자니 엄두가 나질 않았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영화를 집요하게 헤짚어보는 일은 별로 하고싶지 않다. ^^;; 


기본적으로 영화는 즐기기 위한 매체이고, 받아들이기 쉬운 혹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명료한 주제와 장면들을 담고 있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문득 예술영화의 거장 중 한 명이라는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를 찾게 된 건 이런 안락한 자세로 인해 최근 영화에 대한 흥미가 예전에 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열광하면서 보던 블록버스터들이나 선정적인 광고카피들이 난무하는 영화들조차 습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영화는 초라해지고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거창하게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슬럼프같다고 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편식하다가 입맛을 잃어버린 꼴이라 텁텁하고 까끌한 음식으로 자극해보려고 과감하게 다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 앞에 앉았다.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긴장해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알 수 있었고, 싸구려 인터넷 용어인 "두뇌 풀가동" 상태로 엔딩까지 지켜봤다. 덕분에 값비싼 특수효과나 화려한 컴퓨터그래픽들이 주지 못했던 화끈한 전두엽(!) 마사지를 받게 됐다. ^^;; 


영화관람 후 오래간만에 시간을 조금 더 들여 정보를 수집했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영화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훌륭한 예술영화들을 만들어서라기보다는 "영화"라는 장르가 예술의 한 종류임이 분명하다는 걸 증명했다는 데 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라는 확인했다. 


잉마르 베리만 이전까지는 "영화"가 예술의 한 형태라고 얘기하면 그건 하나의 "주장"에 가까웠으나, 그의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후, "영화"가 예술의 한 형태라는 게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라고 한다. 요즘 영화팬들에게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의아한 얘기지만(요즘은 고전영화하면 예술영화와 비슷하게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라고 본다.^^;;), 1895년에 영화가 만들어지고 1950년대까지 영화의 위상은 예술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격상은 잉마르 베리만 혼자서 이뤄낸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페르소나"를 보면 아마 공감할 것이다. ^^;; 







영화 "페르소나"에 관해서는 대개 난해하다고들 한다. 미국의 대중적인 영화평론가 로져 에버트는 "페르소나"가 아주 명료한 영화라고 했지만, "페르소나"는 곱씹을수록 더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보고 있고 이에 아주 공감한다. 로져 에버트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단수라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힌트라고 했다.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 1권 참고)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기억나겠지만, 영화 후반부에 두 주인공인 연극배우 보글러 부인(리브 울만)과 간호사 알마(비비 앤더슨)의 얼굴들이 반쪽씩 합쳐저 하나로 되는 장면이 있다. 잉마르 베리만은 두 여배우들의 못생긴 한 쪽 얼굴들을 이중인화해서 하나로 만들어 여배우들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당연히 그들은 서로의 얼굴이 이상하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 참고. 1998년)


이쯤에서 "페르소나"라는 단어에 대해 설명하자면 원래 그리스어로 연극배우들이 쓰는 "가면"이나 "탈"같은 것들을 뜻했는데, 정신분석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이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 관계 속에서 본 모습과는 다른 행동이나 습성을 보이는 것에 대해 "페르소나"를 사용하고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이런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분야에서는 영화감독들이 영화 속에 자신의 분신 역할을 하는 배우들을 자주 등장시킬 때 사용한다. 간혹 "페르소나"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보는 얘기들도 있으나, 약간 왜곡된 것으로 추측된다. 







영화 "페르소나"는 잉마르 베리만의 다른 영화들처럼 그가 기억하는 현실을 영화에 투사시켜 내면적인 치유나 극복을 위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먼저 잉마르 베리만이 직접 쓴 "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시공사, 1998년)에 15쪽 분량(사진 포함)를 참고로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정리해 본다. 


그가 "페르소나"를 만들게 된 이유는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 외에도 왕립극단 단장으로 역임하면서 예술적 창의성이 메말라가는 것을 느끼고, 다시금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무언가 내세우기를 좋아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려 순수했던 시절로 되돌아가 마음껏 자유를 느끼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페르소나"가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창작노트의 "페르소나" 챕터는 "나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작업하면서 오직 영화만이 발견할 수 있는 무언의 비밀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라고 끝맺는다. 


영화 속에 커다란 비극들(예를 들면, 분신사건같은..)은 개인적인 형태의 예술이 사회적인 사건들로 인해 희미해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이 토론에서 그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보글러 부인은 실어증이 아니라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관객들이 잘 파악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는데, 요약하기 어렵게 적혀있어 이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 적어도 단순히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영화 속 주요 사건 혹은 메시지로 추측되는 것들이 시간과 공간이 아닌 마음 속 혹은 정신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길 원했다고 한다. 


알마 간호사가 보글러 부인이 깨진 유리병을 밟도록 놔두는 것은 보글러 부인이 정신과 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감춰진 얘기를 적은 것에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페르소나를 가진 알마 간호사가 스스로 얼마나 쉽게 간호사로써의 역할을 잊어버리고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드러낸 부분을 살펴봤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로저 애버트의 의견처럼 분명한 부분들도 많다. 


영화 시작은 소년이 이불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끌어당기는 모습에서 이미 충분한 어머니의 사랑일지라도 끊임없이 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요구하려는 아기를 연상시킨다. 영화임을 암시하는 몇몇 장면들과 소년이 닿을 수 없는 어머니의 얼굴 사진을 향해 손을 움직이는 것 역시 평소 잉마르 베리만이 얘기했던 영화라는 "필요한 환상"에 대한 표현이다. 관객이 영원한 환상일 수도 있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 그 안에 어머니의 얼굴이 들어있는 건 감독의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암시한다. 그는 가족관계가 아주 좋지 못했다. 이후에 영화는 보글러 부인과 자식에 관한 어두운 갈등, 왜곡된 관계가 드러낼 뿐,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영화 초반과 맞무리는 부분으로 보여진다. 


도입부에서는 이런 분명함과 함께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상당히 파격적으로 들어가 있어 당혹스럽다. 무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겠고, 어린 시절의 우울한 반영일수도 있을 것 같다. 이후에 등장하는 멋진 영화장면들에 비해 너무 돌출되어 관객을 긴장시킨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긴장타라고 윽박지르면서도 기분나쁘지 않게 하는 영화는 아주 드물다. 


간호사 알마가 보글러 부인의 편지를 전하러 가는 도중에 편지를 엿보는 장면에서는 빗방울 소리가 마치 주방의 씽크대에서 물새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보글러 부인에게 친근했던 알마의 마음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듯한 느낌도 들고, 보글러 부인의 사생활이 새어나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연이어 알마가 연못가에 서 있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알마가 서있는 곳은 마치 사진처럼 정지된 느낌이지만, 알마의 모습이 투영된 물의 모습에서는 상당한 흔들림이 동시에 보여진다. 간호사 알마로써의 페르소나는 최대한 변화가 없으려고 하지만, 인간 알마의 본질은 이미 어그러지고 있던 것이다. 이 장면 이후부터 보글러와 알마의 치열한 대립과 혼란, 환상적인 체험이 시작된다. 


간호사 알마로부터 시작되는 혼란은 이미지의 향연이자 끝을 알 수 없는 증폭으로 보여진다. 연극배우로써, 사회의 저명인사로써의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보글러 부인을 만남으로해서 왜 간호사 알마가 그토록 쉽게 실체를 드러내고, 가면과 실체 사이를 방황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몇몇 장면에서는 서로의 페르소나를 원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풍김으로써 영화제목 "페르소나"에 대한 최대한의 혼란을 야기한다. 보글러 부인의 표정은 알마의 것과 대비되면서도 결국 다르지 않은 것임을 나타내는데,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보글러 부인이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은 굉장한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먼저 페르소나를 인지하고 벗어던진 보글러 부인의 얼굴과 뒤이어 보글러 부인과의 접촉을 통해 말끔한 페르소나 뒤편의 실체를 인지하게 되는 알마의 얼굴을 어두운 부분만 합침으로써 만들어낸 괴상한 얼굴은 어두운 실체간의 접촉으로 보여진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 대개 잘생긴 한쪽 면으로 전체 얼굴을 간주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배우들의 얼굴들을 양 쪽으로 나눈 뒤 못생긴 쪽만 합쳐 하나의 얼굴(그렇다! 단수다!)을 만들었고, 이 사진을 보자마자 여배우들은 곧장 서로의 얼굴이 이상하게 보여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Ingmar Bergman's Persona (1966)


이때부터 본격적인 난해함이 시작된다.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보여지는 얼굴은 대개 좋게 보이는 쪽이라는 설정이라면 어두운 얼굴을 합친 것은 분명 실체가 결합된 모습이다. 그리고 괴상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페르소나" 역시 분명 밝은 이미지는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원래 계획에는 간호사 알마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과정에서 남자친구가 연기하듯 자신을 대하는 모습에 소름끼쳐 하는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페르소나는 어두운 실체를 담고 있는 만큼 깨지기 쉬운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더러워지기 쉬운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인가 아니면 실체의 어두운 깊이만큼이나 반대급부로 아름답게 보여지는 것인지에 대한 얘기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알마가 영화 초반 아주 조심성있게 환자를 생각하는 차분한 간호사로 등장해 영화 후반 얼마나 쉽게 반감과 분노에 휩싸이는지 떠올려 봤으면 싶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아주 개인적인 기억들에 깊이 접근함으로써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질들에 대한 성찰이 담긴 영화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페르소나"는 관계 속에서 가지게 되는 본질과 조금 다른 가면들이 실존한다는 걸 보여주면서 그 가면과 실체 사이의 반응을 담아냈다. 나의 실체, 나의 페르소나, 상대방의 실체, 상대방의 페르소나가 모두 인지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 모습을 감당할 수 있을까? 


[YES24] 페르소나(Pers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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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했던 " 버킷리스트 " 라는 감동적인 영화가 있었다. " 버킷리스트 " 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은 목록을 말하는데, " 송포유 " 는 그 리스트에 오직 한가지 일만 적혀있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음악영화이기도 하고, 인생의 뒤안길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소박한 사람들의 코미디이기도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 크리스토퍼 에클리스턴 ) 의 화해를 이끌어 내는 가족영화기도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가장 큰 물결을 이루는 건 스스로 초라하다고 여기는 한 사람이 스스로 일어서는 드라마라는 점이다.

출처 : DAUM 영화 송 포 마리온이 원래 제목이다.



사별한 아내 (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분 ) 가 못 이룬 합창경연을 남편이 대신하는 노력을 비춰주는 그레이 로맨스영화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아내는 영화광고에서와는 달리 남편에게 뒷일을 부탁하지 않는다. 아서 ( 테렌스 스탬프 분 ) 가 노래는 부르는 이유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지만, 이제 홀로서야 할 자신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눈여겨 볼 곳은 크게 세 곳인데, 마리온 ( 아서의 아내 ) 이 죽을 때와 생기발랄한 합창단의 여지휘자 ( 엘리자베스, 젬마 아터튼 분 ) 가 비오는 날 밤에 아서를 찾아오는 장면, 그리고 합창경연대회에서 아서가 독창(?)을 하는 모습이다.



겉으로는 무대뽀에 막되먹은 듯한 말투를 내뱉지만 실제 아서는 자격지심이 심하다.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게 아들과의 관계인데, 아들에게 지적질을 하는 이유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어서지만 그럴 듯 하게 내세울 것이 없어 언제나 아내와 관련된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 그러면서도 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스스로 궁색하기 그지없다. 결국에는 아들마저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아서의 초라한 내면이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리온의 죽음이다. 마리온은 아서의 모든 것이었다. 한심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자신의 엉뚱한 모든 행동들에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영화 초반 그들의 모습은 부부지만 어머니와 자식같은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아서는 언제나 내키지 않아하지만 항상 고분고분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마리온이 죽자, 아서는 한없이 추락해 버리고 만다. 아들을 다시는 만나고 싶어하지도 않고, 하루하루를 견딜 수 없어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엘리자베스 ( 합창단 지휘자 ) 를 찾아간다. 자신도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모습을 수줍게 드러내는 아서의 모습에서 엘리자베스는 왠지 모를 연민을 느끼게 되고, 그녀도 괴로운 일이 닥치게 되자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서를 찾게 된다.



오밤중에 젊은 처자가 비를 맞고 혼자 사는 남자 노인네에게 찾아오는 야릇한 상상을 하면 곤란하다. 이 장면은 아서에게는 아주 낯설지만 아서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새로운 사람들과도 잘 지낼 수 있을 지 모른다는 희망과 자신도 뭔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자신감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실제로는 졸릴 눈을 억지로 떠받치며 엘리자베스의 푸념을 들어준 게 전부였지만, 이 작은 사건을 통해 둘은 아버지와 딸같은 친밀감이 형성된다. 그 뒤로 엘리자베스는 아서가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도록 귀엽게(?) 부추긴다.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서는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다. 아내를 합창단에 바래다 준 뒤, 담배를 피운다는 핑계로 나와 몰래 창문을 열고 그들의 노래는 엿듣는 장면들은 바로 아서의 이런 소극적인 감성을 보여준다. 자격지심때문에 경직된 스스로의 모습이 자유롭고 순진한 합창단원들과 어울리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주눅들어 있는 아서에게 엘리자베스는 기꺼이 마리온이 맡았던 솔로의 역할을 맡긴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고, 이제 사라진 남편의 자리 대신 그동안 헛심만 썼던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아서는 아들에게 마지막 초대장을 내민다. 마리온에게 칭찬받았던 아서의 목소리는 영화의 마지막을 훌륭하게 장식한다. 노래 제목은 " Lullabye - Goodnight, My Angel  " 인데, 테렌스 스탬프가 부른 버전으로 한번 들어보길 바란다.



마리온에게 잘지내고 있다며 노래를 들려줬던 그날 밤 아서는 아들의 전화메시지를 들으며 평화롭게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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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밤 11시 EBS < 세계의 명화 > 시간에 평소 보고 싶어하던 " 처음 만나는 자유 ( Girl, Interrupted. 1999 ) " 가 한다길래 시간을 내서 봤는데, 관람 후 아주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다. 글쓴이의 취향에 딱 맞는 스타일의 영화였다. 아쉬운 건 그 시간에 OCN 에서 "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 " 하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점이다. ^^;;

1993년에 나온 같은 제목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1960년대 정신병원에 수용된 소녀들의 우정과 감성 그리고 자아성찰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가끔 TV 화면을 통해 시대상을 노출시키기도 하지만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첫번째 TV 화면에서 여자 요정과 어떤 장교급 군인의 로맨틱한 관계를 다룬 환타지 드라마가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됐던 적이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린 나이에도 좋아라 봤던 기억이 나는데, AFKN ( 주한미군방송 ) 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처음 만나는 자유
감독 제임스 맨골드 (1999 / 독일,미국)
출연 위노나 라이더
상세보기



소녀들의 우정을 다뤘다고 해서 1995년의 " 클루리스 " 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오히려 " 델마와 루이스 " 쪽에 더 가까운데, 마치 1975년의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와 1989년의 " 죽은 시인의 사회 " 가 묘하게 결합된 느낌이다. 게다가 주인공인 수잔나 ( 위노나 라이더 분 ) 와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친구 리사 ( 안젤리나 졸리 분 ) 의 관계는 왠지 " 파이트 클럽 " 의 에드워드 노튼과 브래드 피트 같은 느낌이다. 리사가 실제로 상상 속의 친구라는 뜻이 아니라 리사의 속성이 수잔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방황과 우울함, 고통과 불안정함을 대변한다고 보여진다. 수잔나의 정신적인 성숙과 독립이 리사의 몰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위노나 라이더와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력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제임스 맨골드라는 감독도 기억해 둘 만 하다. 알고 보니 글쓴이가 재밌게 봤던 " 아이덴티티 " ( Identity. 2003 ) , " 3:10 투 유마 " ( 3:10 to Yuma. 2007 ) 를 만들었다. 왠지 " 앙코르 " 를 찾아서 봐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

그밖에도 브리트니 머피, 우피골드버그의 옛모습을 볼 수 있고, 미국 정치 환타지 드라마인 " 웨스트윙 " 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대통령의 딸로 등장했던 엘리자베스 모스도 만날 수 있다. " 웨스트윙 " 에서 봤을 때는 어려보이는 외모로 뽑힌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여러 곳에서 발견되서 놀랬다.

안젤리나 졸리가 대놓고 " 이 구역의 미친 년은 나다 " 라고 뽐내다가 진짜로 미쳐서 방전될 줄은 몰랐다. ^^;; 그나저나 어떤 곳에 돈이 들어갔길래 제작비가 4천만불이나 들었는지 살펴볼 일이다. ^^;;


http://ebsstory.blog.me/501660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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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면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고, 한 주에 6일간 경기가 있다. 월요일 하루를 쉬는데, 이 날은 케이블 TV 에서는 평소 보기 힘든 야구경기들을 우연히(!) 방송해 주곤 한다. 바로 프로야구 2부 리그 ( 퓨쳐스 리그 ) 나 초등학생, 중학생으로 이루어진 리틀야구, 그리고 고교야구들 중 한 경기를 아주(!) 우연히(!) 만날 수 있다.

특히 고등학생 이하의 선수들은 곧잘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들이 땀흘리며 뛸때마다 안타까워하고, 기뻐하는 부모님들이나 친구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야구가 아주 즐겁고 드라마틱한 스포츠라는 걸 느끼곤 한다. 부차적으로는 우리나라 프로야구 1군에서 보여주는 평범한(?) 플레이가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새삼 일깨워준다.

" 굿바이 홈런 " 은 바로 이런 우리나라 고교야구 선수들의 애환과 현실을 잘 그려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고교야구의 인기가 엄청났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이제서야 고교야구에 관한 다큐멘타리가 만들어진 것에는 아쉬움이 많지만, 첫시도로써는 좋은 결과물을 가져왔다고 본다. 등장인물들의 구수한 솔직함과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의 현실이 맞부딪치며 긴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출처 : DAUM




영화는 초반에 우리나라 고등학교 야구의 상황을 알려주고, 잠시 원주고등학교 야구부를 쫓아 가며 관련 인물들과 인터뷰한다. 객관성을 중시하는 다큐멘타리이기에 극적인 효과보다는 평범한 사실들만을 중심에 두고 편집하지만, 그들의 엔딩을 마주하는 순간 어느샌가 관객들을 중심을 잃고 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즐거웠던 꿈에서 깨자 냉정한 현실이 보이고, 아이들은 각자의 길을 간다.

( 이하 영화 스토리들이 언급되므로 참고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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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한 청춘들..

야구의 불모지인 강원도 지역의 원주고등학교 야구부의 2009년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제일 볼거리는 역시 아이들의 모습이다.

국가대표라도 한번 되보고 싶어 죽어라 연습만 하고 싶은데, 야구부원 전체를 다독여야 하는 주장, 주전경쟁에서는 밀렸지만 그래도 야구가 하고 싶어 학교를 옮긴 선수, 강민호같은 선수가 될꺼라 믿으며 낙천적으로 웃는 어린 선수 등등 알고보면 제각각이지만, 똑같이 못하는 옆동네 강릉고한테는 죽어도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들만은 똑같다.

아직 철부지인 1,2학년들과 현실이 코앞에 닥친 3학년들의 괴리감에서부터 다른 야구부에서 밀려 이곳으로 오게된 아이들의 속내까지 밖에서 보기에는 모두 평범해 보이는 고교야구선수들이지만, 카메라 앞에서 마음을 드러낼 때는 하나하나가 조금씩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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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밤 꿈처럼 찾아온 승리

남들처럼 훈련받고, 부지런히 운동하고, 이기고 싶어하지만 지는 게 더 자연스러운 청춘들이 2009년에는 대형사고를 쳤다.

언제나처럼 참가하는 고교야구대회마다 일회전 탈락을 밥먹듯 하던 원주고등학교 야구부가 7월에 열렸던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전국대회 첫승에 이어 제물포 고등학교를 꺾고 4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룬다.

경기에 지는 싫어 야구가 점점 멀어지던 선수도, 자식이 뛰는 모습이 보고 싶어 경기장까지 찾아오신 부모님과 학교 관계자들도 다들 기쁨에 넘쳐 얼굴에서 웃음이 그칠 줄 모른다.

4강에서 개성고와 팽팽하게 맞서다 아쉽게 패했지만, 해냈다는 성취감은 한순간에 아이들의 눈빛을 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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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엔딩과 긴 여운

4강 이후에 달라진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영화는 그동안의 승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훈련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졸업생들 중 아무도 프로야구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야구로 대학에 진학한 3 명중 한 명은 야구를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한다고 한다. 원주중학교에서 코치로 야구일을 계속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야구를 하던 때보다 더 잘됐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자격증 준비를 하는 친구도 있다.

오래도록 애타게 염원하던 승리를 거두고 관중석에 계신 부모님들과 학교관계자들에게 벅찬 가슴으로 인사하던 고교야구선수들의 졸업 후 모습이 이렇게 대비되며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아마 어린 시절에 야구부를 경험했던 사람들이라면 격하게 공감할 것들이 많은 영화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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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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